필자가 지난 2012년 2월 입수해 그 해 4월 국내에서 공개한 ‘김정일의 유서’는 현재 김정은 시대 초기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해당 유서는 김정일이 죽기 1년 전인 2010년 10월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서의 핵심 내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유서 집행자에 대한 내용이다.
김정일은 유서 집행자로 친 여동생 김경희를 지목했다. 연륜과 경력 등 여러모로 부족한 삼남 정은의 후계체제를 온전히 옹립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그는 김정일이 가장 믿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었다. 조직지도부를 이용한 김씨 일가의 후계세습체제 수립에 가장 큰 역할을 인물이기도 했다.
유서의 1조 4항과 10항은 당적 지도와 재정 관리에 대한 내용이다. 북한은 당이 영도하는 체제이면서도 이를 단순하게 정치적 지도뿐만 아니라 행정의 핵심인 재정도 당이 대부분 틀어쥐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유훈적 지시는 아주 유효하다.
구체적으로 △당적으로는 김경희와 장성택, 최룡해, 김경옥이… (정은을) 책임적으로 보좌할 것 △국내와 모든 자금관리를 김경희가 할 것 △단, 다 할 수 없을 경우(사망이나 육체적 능력이 안 될 경우) 김설송이 맡아서 할 것 등이다. 사실상 김씨 일가의 1인 독재체제에 대한 당적 및 재정적 지도에 대한 대부분의 기본 권력을 김경희에게 준 셈이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는 김경희에 있어서도 의미가 깊은 자리였다. 당시 김경희는 당대표자회의 하루 전인 9월 27일, 김정은, 최룡해, 현영철, 최부일, 김경옥 등 최고 실권자들과 함께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최초의 여성 대장이었다.
게다가 칭호 순서에 있어서도 김정은보다 오히려 앞섰다. 당시 당대표자회의가 후계자로서 정은의 공식 데뷔 무대였다면, 경희에게 있어선 조카의 후견인임을 절대적으로 공식화한 자리였다. 실제로 당시 적지 않은 실권을 가지고 있던 중앙당 행정부 부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매제 장성택에게 주었을 법도 한 대장 자리를 김경희에게만 주었다는 사실과 유서의 주요 내용과 매치되는 부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 김정일의 복심이 무엇이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다. 현재까지 공식화된 적은 없지만, 김정일 사후 중앙당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직위에 김경희가 올랐던 것이 확실시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애초 김경희는 제3차 당대표자회에 앞서 정은에게 조직지도부장 겸 당 조직비서에 임명하고자 했던 김정일에 ‘반대표’를 던진 바 있다. 경험이 부족한 정은이 그 막중한 자리에 오른다면, 강경파 진영이 반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 경희 스스로도 조카 정은의 후계 세습 안착 및 공고화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정황들은 여럿 있다. 김경희는 2011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상확대회의 자리에서 사망한 김정일의 입김(유훈)이 작용하여 이미 조직지도부장에 내정된 것으로 보인다. 김경희는 그해 12월 24일에 있었던 김정일 장례식 두 번째 조문 당시, 이미 김정은 뒤 김영남, 최영림, 리영호 다음으로 등장했다.
김경희는 혁명 2세대의 핵심 간부 중 한 사람인 김국태 정치국 위원이 사망한 2013년 12월 당시에도 장례위원회 명단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뒤에 중앙당 비서들로서는 김기남 선전선동비서 겸 선전선동부장 앞에 위치했다. 본래 조직비서는 선전선동비서 앞에 반드시 위치하는 것이 당 내부 규율일 뿐만 아니라 공식서열이다.
북한의 공식 행사 호칭 순서는 곧 당내 서열을 철저히 대변한다. 물론 실권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김정일 사후 공식행사에서 김경희의 위치는 여러모로 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됐음을 알 수 있는 확실한 자료다. 이는 이러한 공식 자료 외에 본인이 직접 입수한 여러 비공개 자료를 통해서도 크로스 체킹이 된 부분이다.
또 한 가지는 그동안 김경희가 맡아왔던 중앙당 경공업부의 변화다. 김정일 생전 경공업부장 자리를 형식적으로 유지해온 김경희는 2012년 4월, 북한 최고의 경제통으로 알려진 개혁성향의 박봉주에게 이 자리를 물려줬다. 박봉주는 1년 뒤 내각 총리직에 올랐다. 현재 경공업부는 안정수라는 당 간부가 부장으로 있다.
김경희는 이미 지난 2009~2010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오빠 김정일의 현장지도 대부분에 동행하여 여러 공간을 이용해 자기의 존재를 공개할 만큼 최고지도자의 스케줄에 깊게 관여했다. 당 조지지도부장에 오른 직후엔 김정은의 스케줄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하며 보좌한 것으로 알려진다. 무엇보다 당과 국가의 지도자로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한 정은이 현장에서 허툰 실수를 하지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컸다. 앞서 말했지만, 이 시기만 해도 경희는 김정은 시대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 확립에 자기의 모든 관심을 최우선에 두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여동생 김경희(왼쪽에서 두 번째)가 함주군 동봉협동농장 현지지도에 동행해 찍은 기념사진. 연합뉴스
김경희 스스로 남편의 처형에 깊게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한 자신의 입지 축소 문제는 어쩔 수 없는 당 내부규율 부분이었다.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경희는 공식적으로 지난해 10월까지 조직지도부장 자리를 형식적으로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장성택 처형 직후인 2013년 12월부터 자리를 비운 것으로 해석된다. 당 내부 규율은 물론 자신의 건강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업무를 진행할 수 없었다. 사실상 당 내 정치적 은퇴나 다름없었다.
자연스레 이 자리는 김정은의 첫째 누이 김설송에게 넘어간다. 이미 김정일은 자신의 유훈을 통해 김경희의 대체자로서 김설송을 지목한 상황이었다. 고모 김경희만큼이나 과거 재정관련 교육이나 당 사업의 경험과 연륜을 최소한 20년 이상 갖추고 있고, 게다가 할아버지 김일성이 가장 귀여워할 만큼 명석한 것으로 알려진 김설송의 실권 장악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보다 중요하게는 김설송이 사실 할아버지 김일성뿐만 아니라 북한 핵심 고위층 내부에서도 김정일의 공식부인 김영숙의 친딸로서 정통 ‘백두혈통’으로 인정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김씨 일가의 버팀목으로서는 제격이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후계자로 등장한 현재 당 내부 규율로는 ‘곁가지’ 문제가 있으나 김설송으로서는 현재 당과 국가의 실제적인 막후실세로서 역할을 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앞으로 ‘김설송 편’에서 따로 취급하겠지만 이 과정에서 한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대목은 아직까지 국내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허나 북한 핵심권부에선 한 차례 폭풍우가 쳤을 정도로 일련의 ‘권력쟁탈전’이었다. 그 일은 바로 김경희의 ‘마지막 복권 시도’였다.
장성택 처형 직후 실권에서 멀어진 김경희는 한두 달간 몸을 추슬렀다. 사실상 권부 핵심에서 김씨 일가의 도전세력을 제거했다는 안도의 마음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자연스럽게 은퇴를 한 것과 진배없었지만, 뭔가 아쉬운 구석이 남아 있었다. 본인이 보기에 조카 정은은 핏덩이에 불과했다. 김정일로부터 최고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정은은 여전히 어리고 미숙했다. 군과 당 내부의 원로들을 포함한 주변 역시 정은을 곧이곧대로 김정일의 후계자로 인정하기 힘든 눈치였다.
자신의 실권을 물려받은 설송도 탐탁지 않았다. 본디 여자 대 여자는 어려운 관계가 아니던가. 특히 자칫 포스트 김정일 체제가 김정은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 안정될 수 있겠지만 이후 김설송이 딴 맘을 먹으면 김정은과 김설송 간에 남매의 난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보다 중요하게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껴서인지 일단 최고의 ‘상왕’ 석에서 내려오자마자 주변에서 자기를 하대하는 눈치를 개인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김경희 마음속에는 핵심 고위층 내에서 ‘어린 정은의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에는 조직비서로서 여전히 내가 필요하다’는 것과 김정은과 김정일의 여성편력의 실제상황을 모르는 하부단위에서는 ‘곁가지문제 척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정계에 복귀하려는 비밀 프로젝트를 조심히 준비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겉마음이었다. 실제 김경희의 더 깊은 심중에는 이러한 명목 아래, 원초적인 권력욕이 꿈틀거렸다. 남편도 권좌에서 물러난 마당에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무한한 ‘권력의 습성’에 배어버린 김경희였다. 권력의 본질이 결코 순응적으로 지배될 수 없었다.
김경희는 지난해 2~4월경 전방위로 복권 시도에 나섰다. 이는 결국 여전히 김정은 체제를 자신의 섭정 하에 두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으로는 현재 당 외적으로 김정은에게는 필요할지 몰라도 내부적으로는 곁가지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태어난 김정은의 장래엔 불명확한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막후실세 조카 김설송과의 정면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경희가 제일 먼저 취한 제스처는 곁가지 인사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일이었다. 필자는 지난 1218호 ‘장성택 숙청의 진실 ③’를 통해 김정은의 둘째 누이인 김춘송의 해외 파견을 비중 있게 언급한 바 있다. 2014년 2월께 있었던, 김춘송의 파견은 응당 해외 자금 관리에 있어서 김정남을 견제하는 차원이 컸다. 그 배경에는 김경희의 압력 또한 존재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앞으로 설송의 손과 발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곁가지 인사인 춘송을 포함해 김정일의 마지막 부인 김옥, 차남 정철까지 해외로 내보냈다. 이는 김경희가 김설송을 중심으로 권력화 되어가고 있는 김씨 일가 내 주요 핵심 인사들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론 예전부터 친했던 ‘자기 사람들’에 도움을 요청했다. 김정은 시대 최고 실세로 여겨지는 최룡해 당시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통전부장, 이미 한 물 간 군 원로 오극렬에게까지 자신의 복권 작업에 힘을 실어 줄 것을 청했다. 앞서 언급한 주요 핵심 간부들은 김설송 진영보단 김경희에 가까운 실세들이었다. 물론 이들 대부분 김경희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김설송이 결코 아니었다. 이미 조직지도부의 주축 세력을 장악한 김설송 입장에서 경희의 복권 시도는 사전에 눌러버려야 할 불온한 싹이었다. 일단 김경희가 도움을 요청한 측근들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다. 2012년 3~4월에 해당하는 이 시기, 갑자기 최룡해와 김양건이 자취를 감춘다.
당시 <일요신문>을 포함해 우리 언론에선 이 두 인물의 실종을 두고 갖가지 해석을 내놓으며 의문을 표시한 적이 있다. 김양건은 3월 11일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오르며 약 두 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룡해 역시 이 시기 ‘감금설’까지 나돌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김양건이 컴백했던 비슷한 시기 김정은의 현지지도 현장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최룡해는 5월경 갑작스레 군 총정치국장에서 당으로 복귀하며 강등을 당한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김경희의 복권 시도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김설송은 이들 실세들을 조직지도부 담당 보위부 등 아지트들에 직접 호출해 자제를 명령했다. 아마 김정일이 남긴 유훈과 실제적으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자녀로서 구속적 의미는 아주 컸을 것이다.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최룡해, 김양건 등은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장 본인들의 정치적 생명은 물론 진짜 목숨도 오갈 판이었다. 물론 최룡해와 김양건 등은 김설송에게 다시 충성맹세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때 장성택 실각을 결정한 ‘삼지연 회의’에서 최룡해나 김양건 대신 김정은과 함께하며 권력 전면에 나선 황병서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책임부부장, 홍영칠 기계공업부 부부장 등 중앙당 책임간부들이 사실상 김설송이 내세운 사람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고모님, 이젠 어려운 일들은 다 젊은 우리에게 맡기고 푹 쉬십시오.’
김설송은 김경희에 아주 점잖으면서도 뼈가 있는 경고를 보냈다. 더 이상 앞에 나서지 말라는 최후의 통첩과 다름없었다. 김경희의 복권 시도는 여기까지였고, 김설송은 공식적으로 지난해 10월경 김경희 대신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의 실제적인 제2인자 자리에 오른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 권력의 정점이자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김정은 입장에서도 나이 많은 고모 김경희의 참견과 섭정이 내심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아버지 김정일의 유훈도 있고 많은 경우 적지 않은 기간 의지해오고 가까이 한 이복누이 김설송에 김정은 역시 무게를 실어줬다는 소식이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