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요즘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스타들이 많다. 과거에는 영화 홍보 일정을 위해 일본이나 홍콩 등을 방문할 지라도 한국엔 들리지 않는 외국 스타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한국 방문 일정을 먼저 잡은 뒤 이에 맞춰 일본이나 중국 방문 일정을 잡는 외국 스타들이 많아졌을 만큼 한국 영화 시장은 급성장했다. 워낙 극장을 찾는 관객수가 많기 때문에 이젠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들도 한국 시장을 중요시한다. 게다가 한류 열풍으로 인해 한국에 관심이 많은 외국 스타들도 많아졌다. 물론 그들의 내한은 개봉을 앞둔 영화 홍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그렇지만 부산국제영화제는 다르다. 개막작 <주바안> 역시 한국 극장에서 정식 개봉할 지 여부는 불명확하다. 개봉할 지라도 극장에서 며칠 버티지 못한 채 흥행성이 돋보이는 다른 영화에 그 자리를 내어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주바안> 출연 배우들은 한국 극장가에서의 흥행을 위한 홍보 목적으로 내한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 됐고 그 사실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며 대거 부산을 찾은 것이다. 이제 그만큼 한국 영화 시장이 성장했으며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의 반열에 올랐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덕분에 기자는 사라-제인 디아스라는 매력적인 여배우를 가까이서 직접 보는 영광(?)을 누렸다. 올해 스무 살이 된 부산국제영화제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20회를 맞이했다. 스무 살, 이제 성년의 나이가 된 것이다. 그만큼 성대한 영화제가 기대됐는데 더욱 기대가 집중된 부분은 바로 상영 영화들이다. 특히 개막작이 궁금했다. 지금껏 20회 가운데 기자는 12번 부산국제영화제를 취재 목적으로 방문했다. 대부분의 개막작을 관람했는데 만족스러운 영화가 많았다. 과연 20회라는 큰 의미를 갖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은 어떤 영화일까, 당연히 기대감이 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소 실망스러웠다. 인도 영화계는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제작하는 나라다. 최근 몇 년 새 한국에서도 인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며 좋은 흥행 성적을 기록한 인도 영화들도 여러 편 된다. 그렇지만 아직 인도 영화는 양에 비해 질은 그리 뛰어나진 않다. 분명 수작들도 많지만 전체적인 수준을 놓고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아직 양만큼 질이 빼어나진 않다. <주바안>은 그 경계선에 있는 영화로 보였다. 다소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투박함이 묻어나는 데다 한국 기준으론 ‘막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영화 <주바안>은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딜셰르(비키 카우샬 분)의 이야기다. 시골을 떠나 대도시로 온 딜셰르는 야심찬 젊은이다. 어린 시절 잠시 만났던 대기업 총수 굴차란 시칸드와 가까워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굴차란의 눈에 든 뒤에는 그처럼 성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전형적인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내다. 그런데 영화는 딜셰르의 또 다른 모습도 계속해서 보여준다.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인 동시에 삶의 진정한 가치와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굴차란은 젊은 시절 벽돌공장 직원으로 시작해 그 공장의 주인이 됐으며 결국 대기업 총수에 이른 인물이다. 대단한 사업가다. 야망으로 똘똘 뭉쳐 성공신화를 쓴 부분이 딜셰르와 닮았다. 그래서 굴차란은 자신을 닮은 딜셰르를 신임하고 딜셰르는 굴차란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한 가지 문제는 가족이다. 젊은 시절 공장 직원이었던 가난한 청년 굴차란은 공장 사장의 딸과 결혼하며 성공신화를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은 분명 굴차란의 빼어는 경영 능력이지만 여하튼 시작점은 아내였다. 그만큼 아내는 남편 굴차란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아들은 나약하다. 뭐든지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는 엄마의 과잉보호로 인해 회사의 사장 자리에 올랐음에도 굴차란의 아들은 나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로 인해 굴차란은 아들보다 딜셰르를 더 신임하게 된다.
당연히 굴차란의 아내와 아들은 딜셰르를 강력하게 견제한다. 사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관계 설정이다. 이 영화에선 주인공이 딜셰르이기 때문에 굴차란의 아들이 악역으로 그려지지만 비슷한 구도의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선 굴차란의 아들같은 설정의 캐릭터가 주인공을 맡고 딜셰르 같은 설정의 캐릭터가 야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역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 <주바안>은 한국의 막장 드라마와 상당히 닮아 있다. 인물 설정만 놓고 보면 매우 친숙한 한국 드라마의 구도다. 그것도 막장. 게다가 스포일러일 수 있지만 한국 막장 드라마처럼 영화 후반부에는 ‘출생의 비밀’까지 등장한다. 인도 영화로 태어난 <주바안>은 제 2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만약 한국 드라마로 태어났다면 막장이라고 욕을 꽤나 먹었을 수도 있는 설정을 갖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주인공이다. 앞서 언급한 매력적인 여배우 사라-제인 디아스가 연기한 아미라는 가수다. 아미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딜셰르를 다시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미라는 가수 캐릭터인 만큼 노래로 딜셰르를 붙잡는다. 영화 <주바안>에서 ‘노래’는 매우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노래는 영혼을 정화시켜주고, 그들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대도시에서 성공을 꿈꾸며 달리는 속세적인 야망과 대비되는 삶의 진정한 가치와 자아가 노래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인도 특유의 깨달음의 정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여주인공 아미라와 노래를 통해 막장 드라마가 될 위기의 영화는 묘하게 균형감을 찾아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핵심은 균형감이다. ‘속세의 야망’과 ‘삶의 가치와 자아’라는 양면적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캐릭터인 딜셰르의 경우 양면적인 캐릭터의 균형감을 적절히 표현해야 한다. 또한 한국의 막장 드라마와 유사한 영화의 캐릭터 설정과 노래를 통한 인도 특유의 깨달음의 정서가 적절한 균형감을 이뤄야 한다. 우선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모제즈 싱 감독이 이를 절묘하게 풀어가는 연출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개막작이 된 것일 게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다 평가가 다르겠지만 기자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딜셰르의 속세적인 야망이 노래를 통해 극복되고 치유되는 과정이 균형감 있게 연출됐다기보다는 너무 기계적으로 표현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기자의 개인적인 해석과 생각일 뿐이니 정확한 판단은 관객들의 몫이다.
아무래도 <주바안>이 제 2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모제즈 싱 감독 때문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이미 능력을 인정받은 독립영화제작자인 모메즈 싱은 <주바안>을 통해 최초로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장편 영화 입봉작인 셈이다. 그리고 그 영화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 됐다. 그것도 의미가 남다른 2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다. 향후 모제즈 싱이 더욱 좋은 영화를 거듭 연출하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성장해 나갈 경우 부산국제영화제는 그가 인도 영화계를 뛰어 넘어 세계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준 셈이 된다. 결국 <주바안>이라는 영화 자체 보다는 모제즈 싱 감독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 이 영화의 개막작 선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