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 2012년 7월 갑작스럽게 숙청당해 국내외에 파장을 일으켰다. 사진은 같은 해 4월 15일 리영호(왼쪽)가 최룡해(가운데), 김정은(오른쪽)과 함께 김일성광장 단상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보는 모습. 연합뉴스
리영호 전 총참모장은 다른 고위급 간부들과는 시작부터가 다르다. 그의 출신성분을 두고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리영호를 항일무장투쟁 가문의 자녀로 추측한다. 그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기 때문이다. 만경대혁명학원은 혁명 유자녀들을 위해 개교한, 즉 특권층만을 위한 군사 중심 중등학교다.
하지만 리영호의 출신성분은 다른 고위급 간부들과 비교해 보잘것없다. 필자가 북한 내부 정보원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리영호는 한마디로 항일 전쟁고아 출신이다. 현지 정보원의 신분보호 때문에 아주 자세한 사정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출신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40년대 소위 김일성이 이끌던 항일 유격부대가 마지막까지 일제 간도특설대와 싸웠던 곳이 중국 안도현 처창즈다. 현재 중국 화룡시 와룡향 화안툰 일대다. 이곳은 간도특설대가 가장 악랄하게 조선의 양민들을 학살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리영호의 부모는 이 지역에서 있었던 간도특설대의 대대적 학살 당시 희생됐던 양민으로 추측된다.
천만다행으로 어린 리영호는 김일성의 영향하에 있던 항일 유격대 출신 혁명가문이 거두어 보살핌을 받게 된다. 원래 부모의 정확한 출생 및 생활 배경이 밝혀지지 않으면, 즉 출신배경이 미해명이면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할 수 없는 것이 북한 간부(인사)사업 원칙이다. 예외적으로 리영호는 자신의 양부모 역할을 한 이 혁명가문의 도움으로 다른 혁명유자녀와 함께 만경대혁명학원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해당 가문의 자녀들은 현재도 당 최고위급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리영호는 이러한 출신성분과 정치와는 상관없는, 오로지 직업적인 군인인 탓에 승진이 상당히 더뎠던 인물이다. 계급 승진 이력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소장 계급장을 단 것은 사실이다. 그가 북한 군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시기는 1998년부터다.
이 당시 북한은 유럽 발칸반도에서 발발한 코소보 전쟁 현장에 군사대표단을 파견한다. 이때 리영호가 대표단의 일원으로 코소보 땅을 밟는다. 당시 나토군 소속의 미 공군기 한 대가 현장에서 격추됐는데, 리영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파편들을 수거해 북한으로 가져왔다. 그가 수거한 미 공군기 파편들은 훗날 북한의 대공화기 개발에 중요한 자료로 쓰이게 된다. 리영호 같은 직업적인 군 작전통이 아니면 세우기 어려운 공훈이었다.
이때부터 김정일 시대 군부 최고실세였던 오극렬의 눈에 리영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하의 김정일도 군 인사에 있어선 꼭 상의했을 정도로 오극렬의 힘은 대단했다. 리영호로서는 오극렬이라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리영호는 이를 배경으로 2002년 그토록 바라던 중장 진급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11기 대의원 명단에도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리영호는 방어사령부에서 주로 근무해온, 포와 관련해서만큼은 작전의 대가였다. 방어사령부 소속 부대는 대부분 포 중심의 기계화 부대이며 김정은이 재학 중이었던 김일성군사종합대학과 가까운 곳에 포진해 있었다. 김정일은 이 시기, 김정은과 가까이 있었던 리영호를 논문지도 교원으로 발탁한다. 차기 지도자와 사제관계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또한 리영호의 아들 리선림은 어린 시절부터 정은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나이는 리선림이 정은보다 열 살 정도 위였지만, 정은의 오른팔로 불릴 만큼 가까웠다고 한다. 심지어 정은은 자기가 타던 벤츠 승용차까지 리선림에게 선물을 했다는 후문이다.
한낱 전쟁고아에 불과했던 리영호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발판삼아 순식간에 군 중심, 나아가 북한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급기야 김정일은 리영호를 김정각, 김격식, 김명국, 현철해 등 군 핵심 인사들과 함께 향후 김정은 시대 군부를 책임질 주축으로 점지했다. 아마 정치와 무관하게 작전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가 주효했을 것이다.
2011년 당시 조선인민군 무장장비부문 일군열성자대회에 참가한 김정각 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 김정은, 리영호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김정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박도춘 당 비서(앞줄 왼쪽부터). 연합뉴스
리영호는 2010년 9월 27일, 김정은이 김경희나 최룡해를 비롯한 6인방이 대장 칭호를 받는 시기 함께 차수 진급에 성공하며 북한군 3부 중 하나인 총참모장에 오른다. 이른바 북한 군부 내에서 리영호 전성시대의 개막이었다.
리영호가 그 자리까지 올라간 배경은 ‘실력’이 절대적이었다. 북한군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른바 ‘정치·작전·후방(군수물자보급)’이 그것이다. 정치가 총정치국 중심의 정치군인들이라면, 후방은 군수물자 보급 분야에 해당한다. 즉 군 작전 시 물자 및 경제권은 인민무력부의 후방담당 군인들이 틀어쥐고 있다. 작전은 일선 야전 지휘관들, 이른바 작전통들을 말한다.
리영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후방에서 경제권을 쥔 것도 아니었다. 리영호는 북한군에서 손꼽히는 전략통이었고, 야전 지휘관의 모델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사리사욕을 몰랐고, 뼛속까지 군사적인 전략만 생각했던 ‘진짜 군인’이었다.
하지만 리영호의 전성기는 너무나 짧았다. 2012년 7월 그의 갑작스러운 숙청은 북한 내부는 물론 국내외에서도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왜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것일까. 필자가 그의 숙청 직후 북한 내부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리영호의 표면적인 죄목은 ‘뇌물수수’였다.
문제가 불거진 때는 그가 숙청당하기 약 4개월 전인 2012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 북한 내부에선 국가보위부 주도로 마약밀매와 관련한 조사가 실시됐다. 해당 조사는 김정일 사망 이전부터 진행돼 왔던 것인데, 그의 사망으로 잠시 중단됐다가 약 1년 6개월 만에 다시금 재개되는 것이었다. 이 조사는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의 한 부부장이 조직지도부의 김경희에 의뢰했고 이를 김경희가 받아들이면서 시작됐다.
핵심은 마카오였다. 북한 필로폰의 마카오 현지 판매권은 현지 국가안전보위부 지부에 독점 할당돼 유일지도를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북한 군 일부 세력이 몰래 마카오에 북한산 고순도 필로폰을 밀매한 것. 이를 포착한 마카오 주재 안전보위부는 곧바로 평양 본부에 보고했다. 재개된 조사에서 군 장성 30여 명이 보위부로 호출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칼날이 리영호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당시 조사에서 리영호는 필로폰 밀매를 대가로 군 내부 인사로부터 약 다섯 차례에 걸쳐 48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뇌물은 리영호가 아닌 그의 부인과 당시 부관 겸 운전사가 받아 챙긴 것이라고 한다. 리영호는 이후에야 이를 알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사 초기에 김정은이 처음엔 자신의 ‘사부’가 연루된 사건인 줄 모르고 “돈을 먹은 자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나 다름없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 이슈화됐다는 것. 이후에야 정은은 리영호가 사건에 연루됐음을 알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리영호는 조사 이후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불려갔고, 이 자리에서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시인했다. 자신이 직접 뇌물을 수수하지 않았지만, 그의 측근들이 한 것은 사실이었고 자존심 강한 군인 리영호로서는 그 어떤 변명도 내놓기 싫었을 터다. 당시로서는 정은 역시 리영호를 두둔할 상황이 아니었다.
2012년 7월 리영호는 군 총참모장을 포함한 모든 직함에서 물러났다. 그동안의 공을 생각해 숙청 뒤에도 그는 처형을 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진 않았다. <조선중앙통신>도 리영호에 대해 “동지”라는 호칭을 써가면서 해임 상황을 알렸다. 어쩌면 그를 존경하고 아꼈던 제자 정은의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뼛속까지 군인이었던 그의 자존심엔 큰 상처를 입었겠지만 말이다.
이는 그가 숙청을 당한 표면적인 전개 과정이다. 그 과정과 배경을 좀 더 본질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필자는 지난 연재를 통해 리영호의 숙청이 장성택의 처형을 앞둔 신호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필자가 당시 그러한 주장을 펼친 데에는 조직지도부 내부 관계자들의 증언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군인이었던 두 형이 군에서 물러나자 선을 댈 적임자가 필요했고, 같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연배가 비슷했던 차에 가깝게 지내왔던 리영호를 지목하게 된다. 조직지도부는 이 특수한 관계에 주목했고, 장성택의 견제 차원에서 결국 앞서의 일을 벌인 것. 필자는 어쩌면 앞서 조사 이전에 리영호의 뇌물수수 과정도 제거를 염두에 둔 조직지도부의 자작극일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이토록 거물급 인사가 순식간에 처리된 데에는 주변의 지원도 큰 몫을 했을 것으로 본다. 오로지 실력을 기반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리영호는 당연히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군인으로서 오직 야전 작전통이었던 순수함이 되레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리영호를 가장 견제했던 인물은 김경희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최영림 전 내각 총리. 최영림은 김일성의 부관을 역임한 원로 간부로서 박봉주 이전 북한의 내각을 통제했던 인물이다. 애초 군 출신이지만, 타고난 정치력과 이를 토대로 한 인적 기반으로 세를 이뤘던 김일성 시대 정치 간부다. 김경희가 어린 시절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을 정도다.
그런데 늘 미사일 실험이나 핵 개발을 비롯해 일선 군사도발을 주도해야 했던 군부와 리영호는 경제적 성과를 내야 하는 내각과 최영림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내각에서 주변국 혹은 친북 국가들과 대외무역을 꾀하려는 찰라, 일순간 군사도발이 발발할 때면 그 계획은 ‘도로아미타불’이었다. 리영호의 숙청 작업에 최영림과의 갈등 관계가 북한 내부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일정한 배경으로 작용한 듯하다.
리영호는 군 내부 경쟁자들과도 결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리영호가 숙청되기 약 2개월 전인, 2012년 5월 필자는 김정각 당시 인민무력부장에 대한 일련의 정보를 입수한 바 있다. 당시 내부 소식통이 전한 내용은 김정각과 리영호의 갈등 관계가 폭발 직전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김정각은 잠재적 경쟁관계인 리영호를 견제하기 위해, 또한 선군시대 이후 권한이 확대됐던 총참모부의 지위를 낮추고 인민무력부의 지위를 높이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는 것.
사제관계에 있었던 전략통 리영호를 내친 김정은의 선택을 두고는 상당히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장성택과의 특수관계가 숙청의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지만, 그 배경에는 선군정치 시대 이후 급격히 커버려 통제가 부담스러웠던 군의 위치도 한몫을 했다. 군과 장성택의 화학적 결합이 우려됐던 것. 리영호는 김정일이 아들 정은에 대한 군의 충성심을 위해 붙여준 인물이었지, 미래에 함께 갈 정은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판단이 더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보다 중요하게는 언젠가 제거해야 할 장성택의 군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판단도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다.
김정은 입장에선 야전 지휘관의 상징과 같았던 리영호의 숙청을 통해 군 내부적으론 일종의 파급효과를 노렸을 수 있지만, 필자가 봤을 때 이는 크나큰 실수다. 앞서 언급했듯 리영호는 정통 군인이다. 야전 지휘관 출신의 최고 작전통이었다. 이후 자세히 다루겠지만 리영호의 숙청으로 북한군은 황병서를 비롯한 정치군인이 득세하는 시대를 맞았다. 이는 곧 북한군의 전력 약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김정은 입장에선 벼룩을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운 격이다. 우리가 정확히 모를 뿐이지 그만큼 북한 정치 안정이 심히 위협받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이는 엄연히 플러스 요인이 되겠지만 말이다.
필자는 리영호가 숙청된 이후에도 그의 행방을 쫓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최소한 2013년 연말까지 리영호는 현직에서 물러났을 뿐, 신변은 무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그의 행방이 종적을 감췄다. 현재로서는 그의 복귀가 요원해 보인다.
특히 북한 군부 하부단위에서는 이러한 내부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지라 리영호를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낙인찍었다는 첩보도 일부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리영호는 언제든지 재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사료된다.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