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계와 비박계가 총선 공천룰을 두고 대치하고 있다. 친박계 좌장 서청원 의원(왼쪽)과 비박계 수장 김무성 대표. 연합뉴스
앞서의 비박계 중진 의원은 “김무성 대표 입에서 우선추천지역이니 전략공천이니 하는 단어가 나온 순간 전세가 뒤바뀌었다고 본다. 오픈프라이머리는 김 대표의 유일한 무기였고 지지하는 세력도, 찬성하는 여론도 분명이 있었다”면서 “그런데 그 벽에 작은 틈이 생기니 김 대표의 의지를 긴가민가했던 사람들부터 틈이 생기길 바랐던 사람들까지 나서 벽을 부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김 대표를 향한 친박의 맹공 속에 김 대표가 취할 몇 가지 시나리오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가정의 수는 이렇다.
① 여야 동시 오픈프라이머리가 무산됐으니 안심번호를 활용한 100% 여론조사를 통해 당의 후보를 결정한다. 이 경우에는 당원들의 반발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의원총회 의결을 통해 본인의 거취 문제까지 거론하며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할 경우 비박계가 다수에다 여론조사 인지도에서 앞서는 현역들의 지원이 클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② 현재 당헌·당규상의 당원(50%) 국민(50%)의 반영 비율을 수정해 국민 의견(선거인단 구성 혹은 여론조사)의 비율을 70~80%까지 높인다. 당원들의 반발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고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는 국민공천 취지도 살릴 수 있다.
③ 100% 여론조사로 하되 우선추천지역, 즉 전략공천 비율을 어느 정도 보장해 친박계의 공간을 열어준다. 야당은 20% 전략공천을 발표했으니 물타기가 가능하다. 열세지역이 아닌 TK(대구·경북)나 서울 강남에서도 우선추천이 가능토록 해 친박계의 공천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준다.
④ 현행 당헌·당규의 50 대 50 비율을 수용한다. 친박계와의 동행을 선택하는 길이다.
①의 경우를 빼면 김 대표는 당대표직을 위협받게 된다. 오픈프라이머리 관철에 정치생명을 걸겠다는 말을 본인 스스로 했기 때문에 국민공천 취지가 일부라도 퇴색할 때에는 실망한 비박계부터 반발할 수 있다. 최근 비박계 4선의 정병국 의원은 “물러설 경우 김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③과 ④의 경우는 친박계로부터의 퇴진 압박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박계 대표라는 김 대표의 입지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대선주자로서 김 대표를 지지했던 당내 세력도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
요약하자면 김 대표는 대표직을 던져서라도 국민공천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대표직을 유지하면서 친박계와 ‘좋게 좋게’ 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해야 할 판이 된 셈이다. 서청원 최고위원이 최근 밝힌 “앞으로는 용서하지 않겠다”, “경고한다” 등의 발언은 일종의 최후통첩인 셈이다.
친박계 한 의원은 “안심번호 도입 오픈프라이머리와 관련해 당 의원총회가 지난 9월 30일 오후 2시에 열리기로 돼 있었는데 당일 오전 11시쯤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 고위관계자 발’ 멘트가 나왔다.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안심번호 도입은 안 된다는 취지였다”면서 “그건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청와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알아서 잘 판단하라는…. 그런데 김 대표는 ‘오늘까지만 참겠다’더니 계속 참더라”라고 했다. 30년 가까이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여권의 한 관계자는 침을 튀기며 이런 말을 들려주기도 했다.
“역대 이런 굴욕적인 상황이 연출된 적이 없다. YS(김영삼), DJ(김대중) 정부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집권여당의 대표를 청와대 수석들이 찾아와 수시로 만나고 통화를 하고 보고(?)를 하고….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과 독대를 해야 할 사람이 그 신하들하고 놀고 있다는 뜻 아니냐. 소위 민주화운동을 자기 정치의 기반으로 했던 사람이 정당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침해받고 있음에도 입 꾹 다물고 있는 것은 스스로 치욕의 자기정치사를 쓰고 있는 것과 같다.”
스크럼을 짠 친박계는 공천룰을 확정할 특별기구 구성을 두고 현재 김 대표와 대치국면이다. 공천룰 목표는 ‘현행대로’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당 후보의 경쟁력이 달릴 경우엔 우선추천을 할 수 있고 나머지 지역은 당원과 국민 의사 반영 비율을 50 대 50으로 공천한다.’ 즉 이 안에는 ‘컷오프’ 제도가 녹아 있다. 후보가 여덟 명, 아홉 명씩 나올 경우엔 어떤 기준을 정해 조별리그에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한 소식통은 “컷오프 제도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써봤다. 현역 국회의원 중 지자체장으로 돌아선 경우에도 컷오프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많은 경우엔 자당 후보의 경쟁력을 들어 우선추천지역으로 꼽았다”면서 “서병수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남경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등은 모두 이 우선추천제도로 입성했지만 친박계로선 친박 단체장을 만든 것을 비롯해 꼴 보기 싫은 당내 쇄신파도 다 여의도 바깥으로 밀어내는 성과를 이뤄냈다”고 분석했다.
즉, 현행대로의 당헌·당규는 어떻게 재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를 주무를 수 있는 고무줄 잣대가 된다는 얘기였다. 여야 오픈프라이머리가 물 건너 간 상황에서 이번 공천룰 싸움은 친박계에게 ‘꽃놀이패’와 같다.
100% 여론조사 경선으로 무게추가 기울면 서 최고위원을 비롯한 이인제 김태호 이정현 최고위원들이 반발하며 집단사퇴를 할 수 있다. 이 집단사퇴 카드는 지난 ‘국회법 거부권 파동’ 속에서 거론된 바 있다. 집단지도체제를 붕괴시켜 김 대표를 고립시킨 뒤 당의 위기를 들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면 된다. 친박계 좌장 중에 비대위원장이 나설 수 있다. 가뜩이나 이번주 ‘정치인 장관’이 물러나고 개각을 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 대표가 대표직을 유지하기 위해 친박계와 손을 잡을 경우엔 양쪽 다 큰 상처 없이 타협점을 마련할 수 있다. 정가는 TK를 비롯한 당 우세지역에 친박계가 우선공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나머지는 여론조사 비율을 높여 후보를 추천하는 식이 될 것이라 관측한다. 하지만 이 경우 김 대표를 믿었던 비박계가 이탈하게 되면서 김 대표는 ‘식물대표’가 될 소지가 크다. 대선후보 자격 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각종 경우의 수를 모를 리 없는 김 대표가 유승민 전 원내대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혜훈 전 의원이 김 대표의 뜻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최근 이 전 의원이 김 대표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유 전 원내대표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유 전 원내대표는 “한번 생각해보자”고 했다. 가뜩이나 TK 물갈이론에 시달리고 있는 유 전 원내대표가 자신을 한번 외면했던 김 대표를 돕는 길에 나설지 주목된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