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호 대표와 박성철 회장 등과 같이 기업인들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포기하고 검찰에 구속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사죄의 의미로 (구속영장 실질심사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심재철)가 청구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는 변호인단을 통해 순순히 구속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범서방파 계열 폭력 조직의 소개로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마카오·필리핀 등 해외 불법 도박장에서의 100억 원대 도박 혐의를 그대로 인정한 것. “도주의 우려가 없고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다투며 ‘불구속 수사’를 노리는 게 통상적이지만 정 대표는 그러지 않았다.
구속영장 발부율이 올라감에 따라 변호인들의 새로운 전략 중 하나가 피의자의 구속영장 실질심사 포기다. 배임을 제외한 횡령·사기·도박 등 기업 대표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는 사건 대부분은 혐의 입증이 객관적 자료로 이뤄진다. 정 대표의 사건도 출국 기록과 계좌 기록, 또 도박장을 세팅했던 조직폭력배 일당의 진술까지 검찰 측이 확보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파악한 정 대표 측이 투항한 셈이다.
탈세, 사기파산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던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정 대표와 같은 맥락이었다. 이들이 선택한 구속영장 실질심사 불참 전략은 하나를 내줌으로서 둘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변호사들의 설명이다. 검사 출신의 한 유명 변호사는 “검찰의 수사를 대외적으로 성공시켜주고 대신 범죄 혐의 중 일부를 용서받으며 신병의 편의를 조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탰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발부하면 검찰은 ‘수사에 성공했다’는 1차 평가를 받는다. 사건 하나하나의 성공 여부가 다음해 인사에 미치는 영향이 큰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의 특성도 이 전략의 주요 배경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플리바게닝(유죄혐의 인정 대신 형량 깎아주기)을 인정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뒤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검찰이 작정하고 털면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어떤 검사도 100% 다 문제 삼지 않습니다. 피의자의 혐의 중 주된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그 대신 범죄 혐의 중 작은 것 일부를 업계의 관례나 뉘우침으로 호소해 제외를 받는 거죠.”
포스코 관련 수사 도중 영장이 청구됐던 박재천 코스틸 대표도 검찰 수사 때부터 적극 협조한 덕을 톡톡히 봤다. 구속기소됐지만 언론의 관심이 줄어들자 법원으로부터 병보석 허가를 받고 풀려났다. 또 검찰은 법원이 선고할 수 있는 박 회장의 횡령 혐의 최저형(5년)에다가, 재판부가 더할 수 있는 감형(절반)까지 더해 2년 6월을 구형했다. 사실상 집행유예를 선고해 달라고 법원에 의견을 피력한 셈이다.
반대로 구속을 피하려다가 ‘피를 본’ 기업인도 있다. 중견기업 A 회장은 회삿돈을 끌어다가 해외원정도박을 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당연히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법조계에 따르면 A 회장이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A 회장은 “구속만은 피하고 싶다. 구속되지 않으면 높은 성공보수를 주겠다”는 당근을 던졌다.
당시 변호인단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어떻게 해도 구속을 피할 수 없다. 한 번은 구속돼야 한다”와 “클라이언트(A 회장)의 요청을 받아줘야 한다”는 쪽으로 갈린 의견은 결국 A 회장의 희망대로 불구속 전략으로 결정됐다. 그리고는 횡령액을 피해자인 회사 측에 급히 갚았다. A 회장의 바람대로 변호인단은 법원으로부터 불구속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폭풍이 너무 컸다. 구속영장 기각이 검찰의 분노를 자아냈다. 검찰은 생각지도 못한 기각에 법원을 맹비난했고, 영장 발부를 위해 장 회장의 추가 혐의를 찾아냈다. 그리고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장 회장은 늘어난 범죄 혐의 금액만큼 또 변제했지만 구속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다보니 법조계에서는 ‘구속되는 게 차라리 낫다’는 말이 나온다. 서초동에서 잘나간다는 한 변호사는 “기업인들이 사건을 맡아달라고 오면 무조건 ‘잘못한 게 있으면 한 번은 구속돼야 한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법원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특히 법원은 사실관계 판단이 마무리되는 2심의 특성상 1심 구속을 너무 피하려고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1심에서 무죄를 받고 2심에서 유죄가 나면 돌이킬 수가 없다. 특히 기업인범죄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조언했다.
“기업 횡령, 배임 사건의 경우 양형 기준이 높습니다. 1심에서 좋은 변호사를 만나서 우연히 무죄를 받으면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2심 재판부가 보기에는 글쎄요…. 열심히 무죄 주장해서 1심에서 무죄를 받았는데 우리 재판(2심)에 와서 갑자기 입장을 바꿔 ‘잘못했다’는 말은 못할 수밖에 없는데 2심에서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면 실형이 나올 수밖에 없죠. 상고해서 대법원에 간다고 해도 사실관계와 양형이 아니라, 법리 적용의 잘잘못만 다투는 대법원의 구조상 실형 선고 결과가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으면 재판부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장점도 있다. 서울중앙지법 항소심 재판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구속은 변호 전략의 가장 큰 부분이다”며 이렇게 정리했다.
“(피고인이) 구속 상태인 사건이 오면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할 때 마음이 편했습니다. 재판을 받는 동안 뉘우쳤다는 게 감형 사유가 되니까. 그래서 변호사로 전업한 뒤 늘 얘기합니다. 1심에서 유무죄를 놓고 무죄라고 주장하려면 실형 선고를 맘속으로 각오해야 한다고. 그리고 구속되면 2심에서는 ‘혐의 인정과 뉘우치는 태도’로 집행유예를 받자고. 그게 제일 효과적인데 피고인들은 구속을 너무 두려워만 하네요.”
남바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