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그런지 록’의 대표 뮤지션으로 통한다. 작은 사진은 파파라치가 커트 코베인이 죽은 현장을 찍은 사진으로, 혈흔이 보이지 않는다.
1994년 4월 8일 금요일 아침 8시 40분이었다. 커트 코베인은 죽은 채 발견된다. 미국 북서부에 있는 워싱턴주 시애틀. 워싱턴 호수 연안의 레이크 워싱턴 동쪽 대로 171번지. 바로 커트 코베인의 집이었고, 그가 죽은 곳은 차고 위의 2층 방이었다. 발견한 사람은 게리 스미스. ‘베카 일렉트릭’이라는 무인 경비 회사의 직원으로 보안등을 달기 위해 방문했다가 발견한 것이다. 그는 회사에 보고했고, 이후 방송을 통해 비보가 전해졌다. 경찰이 도착한 건 오전 10시 15분경. 이미 피는 응고된 지 오래된 상태였고, 가까운 곳에 유서가 있었다. 자살이었고, 도구는 기다란 산탄총(샷건). 총은 그의 몸 위에 놓여 있었다. 양쪽 팔꿈치 안쪽에 상처가 보였다. 방엔 마약 투약 기구, 지갑 등이 있었다.
11시경엔 감식반이 도착했다. 자살로 결론 내렸다. 방은 안에서 고정되어, 외부 침입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부검 결과 커트 코베인은 3일 전인 4월 5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혈관에선 1리터당 1.52밀리그램의 헤로인이 검출되었다. 치사량을 훨씬 넘기는 수준이었다. 약간의 바륨도 나왔다. 모든 정황상 자살이 확실해 보였다. 4월 10일 시애틀 센터에서 장례식이 열렸고, 식장엔 유서를 낭독하는 코트니 러브의 목소리가 흘렀다. 의식이 끝나도 팬들은 그곳에 남아 추모를 멈추지 않았고, 코트니 러브는 집에서 커트 코베인의 옷을 가져와 그들에게 마지막 선물처럼 나눠 주었다.
긴 기간 동안 이어졌던 우울증, 마약 중독, 그리고 자필 유서. 이 세 가지는 커트 코베인이 자살했다는 명백한 증거처럼 부각되었다. 사촌이자 간호사인 비벌리는 커트 코베인의 가계도를 언급하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쪽 모두 우울증에 의해 자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죽은 건 혈통에 의한 운명처럼 보였다. 평소 그의 모습에 대한 증언들도 자살을 뒷받침했다. 찰스 크로스가 쓴 전기 <천국보다 무거운>을 보면, 너버나의 베이시스트였던 크리스 노보셀릭은 이렇게 회상한다. “커트 코베인은 정말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인간 관계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노보셀릭은 커트 코베인이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했고, 죽고 싶어 했다고 이야기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커트 코베인의 죽음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마약, 특히 헤로인이 그의 생명을 서서히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그가 헤로인에 손을 댄 건 극심한 통증 때문이었다. 그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1991년 유럽 투어 기간엔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아팠다. 본격적으로 헤로인에 빠진 건 이때부터였다. “당장이라도 머리가 잘려나갈 것 같은 아픔을 잊게 해주는 건 헤로인밖엔 없다”고 말하곤 했던 그는, 심한 중독에 빠졌고 이 상태는 죽기 전까지 이어졌다. 1994년에 수술을 통해 위의 통증은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마약 중독 상태는 계속 이어졌다.
해프닝이지만 상징적인 사건도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이었던 1994년 3월 2일, 그는 코트니 러브와 딸 프랜시스를 데리고 로마 여행을 떠났다. 이때 호텔에서 커트 코베인은 의식을 잃는다. 코트니 러브는 그가 자살했다고 생각했지만, 앰뷸런스에 실려간 코베인은 약 20시간 후에 의식을 찾았다. 깨어난 후 그는 전혀 자살을 기도한 게 아니며, 코트니와 함께 파티를 하던 중 의식을 잃었다고 말했다. 과도한 약물을 알코올과 함께 섭취했을 경우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코베인 자신이 죽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너바나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된 1993년 3집의 제목은 <In Utero>(자궁 안에서)였다. 마치 생명의 회귀를 원하는 듯한 제목이다. 게다가 코베인은, 이후 농담 삼아 지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 앨범의 제목을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나 자신이 싫고 죽고 싶다)로 지으려 했다.
흥미로운 건 그가 죽은 지 20년 만에 발견된 네 롤의 필름이었다. 증거물 창고 선반에 있던 것으로, 그가 죽은 현장을 좀 더 선명하게 담기 위해 35mm 필름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이 필름은 현상되지 않고 창고 안에 처박혀 있다가 2014년 3월에 와서야 현상소로 가는데, 시애틀 경찰서의 수사관 마이크 시에신스키는 필름을 확인한 후 명확한 자살이라고 재차 단정지었다. 하지만 그는 필름을 대중에게 공개하진 않았는데,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고 눈 주변에 흉측한 상처가 있는 그의 모습을 굳이 공개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타살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첫 번째로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은 리처드 리였다. 그는 시애틀의 퍼블릭 액세스(시청자 참여 프로그램) 라디오 진행자로, 코베인이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후에 ‘커트 코베인은 살해되었다’라는 시리즈의 첫 에피소드를 방송했다. 그는 경찰 발표의 몇몇 모순들을 지적했는데, 가장 이상하게 생긴 것이 총상이었다. 코베인의 차고 밖에 있는 큰 나무 위에 올라가 찍은 파파라치 사진을 입수한 그는, 산탄총으로 자살했다면 흥건해야 했을 혈흔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톰 그랜트라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코베인은 죽기 전에 마약 때문에 재활원에 간 상태였는데, 이곳에서 탈출해 행방이 묘연해지자 코트니 러브는 사설탐정이자 전직 경찰인 그랜트를 고용했던 것. 그는 경찰과는 다른 루트로 코베인의 죽음에 접근했고, 결국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주에 이어진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