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전 국정원장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10.4남북정상선언(도서출판 통일)’의 제목을 달고 출간된 해당 저서는 김 전 원장 외에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 이재정 경기교육감(당시 통일부 장관)이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해당 저서는 ‘제1부 10.4남북정상선언의 시대적 배경’ ‘제2부 대북 특사파견에서 선언 도출까지’ ‘제3부 협의과정·내용 및 그 의미’ ‘제4부 10.4남북정상선언 평가’ 등 총 네 파트로 구성됐다. 그 중에서도 역시 핵심은 정상회담 개최 합의부터 합의문 도출까지 일련의 과정을 공개한 두 번째 파트다.
남북정상의 합의 후 문안 협의 및 조정과정에서 남북 실무진들은 적잖은 기싸움을 벌였다. 사진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모습.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당시 정상회담 추진 배경이다. 김 전 원장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대해 애초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유에서 시작됐음을 이번 회고록을 통해 분명히 밝혔다.
정상회담을 1년 앞둔 2006년 7월과 10월, 북한은 연달아 미사일 실험과 1차 핵실험을 감행하며 국제사회의 긴장을 고조시켰지만, 이듬해 2월 6자회담을 통해 중유지원 대가를 받고 영변 핵시설 폐쇄에 합의하면서 해빙무드가 조성됐다.
김 전 원장은 2006년 11월 23일,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날부터 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는 복안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 복안은 공개적 대북특사는 통일부 장관이 맡되, 국정원장인 본인은 비공개 밀사로서 업무를 분담한다는 것.
임명 첫날, 김 전 원장은 이미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계획’이라는 한 장짜리 보고서를 가슴에 품고 청와대로 향했다. 그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의 첫 독대 보고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제안했다.
그가 책에서 밝힌 노 대통령의 첫 반응 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 같은 김 전 원장의 제안에 “북핵문제 해결이 중요한데 남북정상회담 추진하는 것은 부적절하지 않느냐”라며 “만나봤자 성과도 기대되지 않고, 그럴 경우 국민들에게 부담감만 느껴진다”고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향후 성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었던 김 전 원장은 노 대통령에게 “김정일 위원장은 통이 크고 기지가 있으니 두 정상이 만나면 합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끈질기게 강권했고, 이에 대통령이 고심 끝에 극적으로 추진을 허락하면서 본격적인 남북회담 닻이 올랐다.
이 계획이 본격화된 것은 2007년 5월 북측에 장관급 회담의사를 전달하면서 부터다. 그해 7월, 김 전 원장은 북측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으로부터 비공개 방북을 요청받았다. 8월 비공개로 방북길에 오른 김 전 원장은 김양건 부장과 첫 대면자리서 상호간 남북정상회담 건의에 합의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김 전 원장은 저서를 통해 그해 9월 26일, 김양건 부장의 극비리 방한 일화에 대해 소개했다. 당시 김 부장은 정상회담 추진에 대한 북측의 안을 들고 왔는데,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한 입장을 협의하고 조율하는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청와대는 북측의 안에 대한 답을 김 부장에게 쥐어주지 못했다. 당시 김 부장은 적잖게 당황해 화가 났고, 김 전 원장은 그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궁색하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0월 2일, 노 대통령 내외는 군사분계선을 육로로 넘었다. 김 전 원장은 첫날 오후 4시,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있었던 북측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제도상 북한 정부의 최고위)과의 불꽃 튀기는 전초전에 대한 일화를 공개했다.
이는 곧 경제협력에 대한 강조인 셈이었으며, 북한 입장에선 개혁·개방의 요구 취지로 받아들였을 터였다. 이에 김영남 위원장은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품에서 꺼낸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사상과 이념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해서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우리 측의 군사 훈련에 대한 유감과 북핵 문제의 근본은 미국의 적대적 대북정책임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을 앞에 두고 행한 이 연설은 무려 40분을 넘겼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특유의 ‘정면돌파’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 자리서 노 대통령은 “그 쪽 하시는 말씀 듣고 ‘내가 잘못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라며 “이런 식으로 얘기할거면 뭐 하러 만났습니까? 내일 김정일 위원장도 이렇게 하시면 오전에 짐 싸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드는 군요”라고 노구의 김영남 위원장을 향해 쏘아붙였다. 직설화법을 즐겨 사용한 노 대통령 특유의 대응방식이었다.
10월 3일 개천절, 오전부터 시작된 노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알려졌다시피 오전과 오후를 기점으로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김 전 원장의 표현에 의하면, 오전 정상회담은 한 마디로 쌍방 간 평행선을 달렸다는 것.
오전 회의장서 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의 공동번영 △화해와 통일 등 세 분야의 진전에 대해 강조했지만, 애초 이를 듣고 있던 김 위원장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되레 김 위원장은 작심 발언으로 노 대통령을 쏘아붙였다.
오전에 평행선을 달리던 정상회담은 오후부터 성과가 나타났다.
김 위원장은 △북한에 실속 없는 이벤트성 남북정상회담은 무의미함 △한국은 자주성이 없고 정권교체가 빈번하여 대북 합의사항을 일관성 있게 이행하지 않음 △남측의 NLL 이남과 북측이 군사분계선 이북 사이에 남북공동어로구역을 설치해야함 등 취지의 발언에 이어 아예 남측이 제안한 해주 특구 설치 등 경협 문제에 대해선 “총리급 회담 등 하위 회담에 위임하자”고 판을 정리하고 싶어했다. 위기감이 고조됐다.
다행히 김 위원장이 맘을 풀기 시작한 것은 노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시각의 발언을 꺼내면서부터다.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와 한미관계에 대해 “신뢰는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 국제사회에서 사실 그렇습니다. BDA문제(당시 국제사회가 북한 계좌를 동결했던 방콕델타은행 사건을 말함)는 미국이 잘못한 것인데, 북측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북측 보고 풀어라하고, 부당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라며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지지를 확보해야 됩니다”라고 북한의 협조를 구했다.
김 전 원장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의 말에 인상을 받아 크게 맞장구쳤고, 이에 노 대통령은 즉각 개방 얘기를 꺼냈다. 그렇게 가까스로 노 대통령과 남측은 오후 회의 연장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오전 회의가 냉탕이었다면, 오후 회의는 반전과 온탕이었다는 후문이다. 당시 남북합의, 특히 경협 성과의 핵심이었던 ‘NLL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어로구역 설정 및 해주공단 개발’ ‘개성공단 3통(통신·통행·통관)문제 해결’ ‘금강산 면회소 설치’ ‘한강골재 채취 공동사업’ ‘백두산 관광 사업’ 등 안건은 이 때야 비로소 풀렸다고 한다.
회의 말미에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건넨 ‘비밀문건’에 대해선, 이미 과거 정상회담 녹취록 유출 사건 당시 초점이 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 전 원장은 “일종의 ‘주요 의제별 북한식 버전 문서’로 회담 시간이 짧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할 것으로 예측하고 만든 자료”라며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미리 참모들에게 지시해 놓은 것”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김 전 원장은 남북정상의 합의 뒤, 문안 협의 및 조정과정에서 북측과 적잖은 기 싸움을 벌였다고 일화를 공개했다. 회담 이후 노 대통령은 편안한 마음으로 능라도 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지만, 김 전 원장과 북측의 김양건 부장을 비롯한 실무진들은 양 정상의 선언문을 작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3시, 양측 인사들은 각자가 작성한 선언문 초안을 들고 숙소에서 만났다. ‘자주 문제’ ‘종전선언의 주체문제’ ‘남북 공동어로구역 설정’ 등 민감한 문제를 두고 남북이 의견을 달리했다. 첩첩산중이었다. 이 당시 남북 실무진들 사이에선 의견을 조율하느라 협박과 고성이 오갈 정도였다고 한다. 김 부장은 북측의 입장이 수용되지 않으면 선언문에 동의할 수 없다는 배수의 진까지 들고 나왔다.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김 전 원장은 이날 조찬에서 협의 결과를 들고 왔고, 결국 노 대통령이 ‘자주’에 대한 북측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종전선언의 주체문제’에 대한 부분은 북측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현재의 10·4선언문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꼿꼿장수’ ‘굽실만복’은 오해? “그도 악수하기 전에 머리 숙였다”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뜻밖의 스타가 탄생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방북했던 김장수 현 주중대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장수 현 주중대사(왼쪽)와 김정일 위원장의 악수 모습. 가운데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당시 김장수 대사는 평양 4.5문화회관 앞에 마중 온 김정일 위원장과 꼿꼿이 선 자세로 악수를 했다. 적국의 수장 앞에 남측의 군을 대표하는 인사로서 자존심을 지켰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고, 이 같은 모습은 남측의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됐다. 반면, 옆에 있었던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고개를 숙인 채, 김 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면서 ‘꼿꼿장수, 굽실만복’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김만복 전 원장은 이번 저서를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꼿꼿장수 김장수도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이다. 김 전 원장은 저서를 통해 “옆에 선 김장수 장관도 (김정일 위원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머리를 들어 악수했다”라며 “이를 두고 한 언론에서 김만복 국정원장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장면과 김 장관이 머리를 들어 악수하는 장면을 대비시켜 김만복 국정원장을 비난했다”라고 억울함을 직접적으로 표시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