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금관총 유물 8점.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한국에서 불법 반출한 유물이다. 사진제공=문화재제자리찾기
“남월매가 호리 관장과 가까이 하는 한편 욱과도 기묘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수년 전의 왕관사건 이래의 일이었다…그 당시는 전선적(全鮮的)인 화제를 던진 것으로, 주인공인 월매도 덕분에 기계(妓界)에서 한때 날린 것이었다…당대의 지사가 취흥에 맡겨 박물관에 비장된 신라조의 왕관을 유두분면(油頭粉面·화장)의 월매에게 씌우고선 이를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것인데 그 일의 길잡이를 선 것이 호리 관장이었다. 이 하룻밤의 은밀한 놀음이 한번 항간에 드러나게 되자…국보의 존엄을 모독한 지사의 경거(輕擧)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
이야기는 그냥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니었다. 1935년 9월에 일어났던, 우리 문화재의 수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막힌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사건이 일어난 지 9개월이 지난 1936년 6월 29일 <부산일보>에 실렸다. 기사 제목은 ‘금관의 파문,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玩弄)물로’였다.
사정은 이랬다. 19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특별전을 열었다.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瑞鳳塚) 출토 금제유물들을 전시했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다. 그는 고고학자로 경주 발굴에 관여했던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다. 고이즈미는 전시회가 끝나던 날 축하연회를 열었고 기생들과의 술자리가 질펀해지자 기생 차릉파(車綾波)의 머리에 금관을 씌웠다. 금제 허리띠와 금귀고리, 금목걸이까지도 그녀의 몸에 휘감았다. 기념으로 금관을 쓴 차릉파의 사진도 찍었다. 마치 ‘신라여왕’을 끼고 술을 마시듯 마음껏 여흥을 즐겼다. 신라와 신라금관은 이렇게 능멸을 당했다. 하지만 ‘금관사건’의 주범인 고이즈미는 시말서만 쓰고 견책을 받는 데 그쳤다. 그는 여전히 경주발굴을 주도했던 저명한 고고학자로 남아 있다.
새로 출토된 금 귀걸이 - 국립중앙박물관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경주 금관총 최종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칼집 장식에서 ‘이사지왕도’(爾斯智王刀)와 ‘십’(十)이라는 명문과 금 귀걸이가 발견되었고, 금관총의 핵심적 무덤 구조를 새롭게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하지만 총독부는 전문가도 없이 4일 만에 유물 수습을 마무리했다. 마구잡이 발굴이었다. 보고서도 제대로 작성될 리 없었다. 이 와중에 금제장식을 비롯한 유물 8점은 빼돌려져 소위 ‘오구라 컬렉션’에 들어갔다. 오구라는 자신의 수기에 불법 반출된 유물을 경주 금관총 출토라고 명시했고 1981년 도쿄박물관에 기증했다. 지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금관총은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발굴됐다. 따라서 유물이 외부로 반출되는 것은 불법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스님은 금관총 유물 8점이 도굴품임을 확인했다. 도굴품을 기증받은 것은 불법이므로 국제박물관 윤리강령 위반에 해당된다. 혜문 스님은 국제 박물관협회(ICOM)에 소장을 접수할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미정리 유물을 정리하여 상세한 발굴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경주 일대 발굴고분들에 대한 자료조사가 미비하여 재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다. 3월부터 6월까지 금관총 발굴에 나섰으며 내년에는 서봉총 발굴 조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늦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문화재 환수를 위해서는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우리 문화재가 어떻게 유출됐고,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를 입증하지 못하면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렵다.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숙제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해외문화재[海外文化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오구라 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사회평론아카데미) 혜문닷컴 경향신문(신라 57대왕은 평양기생? 20030602) 영남일보(경주 금관총 수난사 2015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