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과거는 꿈과 같다. 잡을 수 없으니. 그 점에서 내게는 신화와 역사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부터 이 땅에 전해져온 이야기, 이 땅의 이야기는 친숙하고도 소중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내 안에 있다. 내 속에는 서원을 세우고 길을 떠나는 환웅도 있고, 쑥과 마늘을 먹어야 했던 곰도 있다. 포기해버린 호랑이도 있고, 동굴의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하늘의 아들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 웅녀도 있다. 삶이 힘들 때마다 우리는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웅녀에게서 위로를 받지 않았는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철학을 하는 나, 신화를 불러내어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데 익숙한 내게는 신화와 역사가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을 어떻게 보는지. 분명히 하나의 관점이 아닐 것이다. 다양한 관점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역사를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마중물이다.
예술사와 문화사의 선구자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라 했다. 우리는 과거 속에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 위에서 탄탄하게 시작한 장수왕은 왜 평양 천도를 했을까. 그것은 광활한 만주벌판의 꿈을 포기한 악수인가, 탄탄한 고구려를 만들기 위한 신의 한수인가.
부패와 무능으로 망했다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또 다른 이름 ‘해동의 증자’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신라의 영웅 김춘추는 진짜 영웅인가, 역사의 반역자인가. 그렇게 먼먼 이야기부터 현대사의 중심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까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시각으로만 볼 수 없는 역사적 문제다. 역사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고 했던 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고 불렀던 그 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이다.”
하나의 사태는 하나의 관점만 허용된다고 믿는 사람과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화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아름다운 공존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하려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 대화는 어느 한 그룹에서 독점할 수 없다. 그것은 지극한 상식이다. 분명히 교과서가 하나면 배우는 학생들 입장에서 혼란은 없을 것이다. 요구하는 모범답안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역사 수업은 호기심도 생기지 않고 재미도 없을 것이다.
왜 모든 창조가 혼돈에서 시작하겠나. 자기 입장을 갖기까지 다양한 입장을 접해보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역사교과서가 하나뿐인 나라는 북한과 베트남, 몽고, 스리랑카뿐이라는 사실이 보여주는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