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부위원장이 김영철 정찰총국장(왼쪽부터)과 함께 조선인민군 제322군부대를 시찰했다. 원 안은 오극렬 부위원장. 연합뉴스
이미 지난 연재를 통해 밝혔지만, 김정일이 삼남 정은으로의 후계세습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시기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병상에서 일어난 2009년 초부터다. 비밀리에 대내적으로 2009년 2월에 확대 개편되면서 탄생한 군 산하 공작기관 ‘정찰총국’은 후계세습 과정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필자가 연재 첫 회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김정일이 깨어난 뒤 가장 먼저 손을 댄 작업은 군 실세 오극렬의 힘을 빼는 것이었다. 정찰총국의 탄생은 ‘오극렬의 쇠퇴’와 매우 관련이 깊다.
그 배경과 내막은 이러하다. 기존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에는 작전부, 대외정보조사부로 불리는 35호실, 사회문화연락부 혹은 대외연락부로 불리는 내각 225국 등 공작기관이 편재돼 있었다. 우선 35호실은 남한을 제외하고(필요에 따라 다루기도 했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을 비롯하여 유럽 및 중동과 동남아에서 북한과 관련한 모든 해외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다. 최근 우리 언론에서 논하는 내각 225국은 실제 대남 간첩들을 침투시켜 활동하는 ‘스파이(간첩)’기관이다. 225국은 지난 2012년 있었던 ‘왕재산 간첩단 사건’의 장본인이다.
그러나 이 정보기관들 중 노동당 공작기관의 핵심은 당 비서국 전문부서 중 하나인 작전부다. 앞서의 35호실과 225국이 일선 활동 기관이라면 작전부는 이러한 공작활동을 위한 작전을 짜고 기획하여 실제 간첩들을 작전지에 투입 및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35호실이나 225국 산하의 요원들이 작전에 나설 경우, 작전부는 모선 혹은 잠수함을 투입시켜 접선이나 비밀공작 활동을 꾀할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현지에서 직접 테러공작이나 필요한 비밀작전을 수행한다. 북한 조선로동당 작전부의 해상투입작전능력은 전 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지난 1998년 속초 잠수정 침투사건을 주도했던 기관이기도 하다.
기존 작전부의 파워는 대단했다. 그 힘은 김정일 시대 군부 실세 오극렬로부터 나왔다. 빨치산 2세 출신인 오극렬은 만경대혁명학원 시기 김정일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이후 김정일의 권력쟁탈에 기여한 공로로 북한 군 최초로 40대에 인민군 총참모장 및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기용됐다. 물론 이전 1962년에 구소련 푸른제군사대학을 높은 성적으로 졸업한 1등급 지휘관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민군 대장과 당 작전부 부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당 중앙위원, 당 정치국 후보위원, 당 정치국 위원을 역임했다. 사석에서는 김정일의 술친구기도 했던 그는 실제 김정일 시대까지 군 인사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던 인사다.
오극렬은 1989년부터 2009년 2월 통·폐합되기 직전까지, 당 작전부 부장으로 있었다. 북한 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집행부서로서 실제적 파워를 가지는 중앙당 비서국 부서의 부장으로서 오극렬만큼 오랫동안 한 부서의 부서장으로 있었던 인물은 거의 없다. 때문에 오극렬은 자기 손때가 묻은 작전부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넘겨주지 않았다. 작전부의 수많은 부부장들이 물갈이됐을 때도 오극렬은 요지부동이었다. 또 작전부의 실제적인 능력은 북한 내 다른 정보 및 안보 기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상으로 만들었다.
이는 본인 스스로 ‘전략 및 전술정보’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해상작전수행을 위한 능력은 김정일도 인정한다. 김정일이 배에 탈 때 측근 경호원들을 제외하고 주변 5km 해상경호는 작전부 해상작전국이 맡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정예부대인 작전부가 당내 해외 공작기관 중 하나였던 35호실과 함께, 2009년 2월 돌연 군의 한 정보공작기관인 정찰국에 소리 소문 없이 통·폐합된다. 한편, 기존의 대외연락부는 일부 전문가들과 언론에서 공개된 것처럼 단순한 내각 산하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실제론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로 편입되어 일명 내각 225국으로 불려진다.
당시 오극렬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20년 동안 자신의 권력기반으로서 애지중지했던 ‘작전부’가 한 수 아래인 군 정보기관에 통·폐합됐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언제나 자신을 총애했던 김정일의 ‘배신’ 때문에 가슴이 쓰렸다. 때문에 2009년과 2010년 사이 북한 내부에서는 작전부 통·폐합에 충격을 받은 오극렬 일가의 망명설이 외부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당 공작비밀기관을 받아들이게 된 기존의 군 ‘정찰국’은 당시 인민무력부가 아니라 인민군 총참모부 소속의 일개 정보기관이었다. 주요 과업은 휴전선 이남 작전반경 100km 한계까지, 유사시 북한군 작전과 관련된 남한군의 모든 활동을 정찰하고 감시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전시 상황에 돌입할 경우 이 정찰국 산하 부대는 휴전선 이남 전투작전에 꼭 필요한 개활 및 후방 지대 전술정보를 미리 파악해 보고하는 의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 위상이라고 한다면, 군내에서는 총정치국이나 보위사령부(현재 보위국)에도 견줄 수 없는 그야말로 평시에는 일반수준의 정보기관이었다. 더군다나 중앙당 비서국 주요 부서로서 작전부나 35호실이나 대외연락부 같은 부서에 비하면 대비도 안 될 정도로 정보를 다루는 기관 중에서도 별 볼일 없었다. 당시 2009년에 인민군 총참모부에는 보통 예닐곱 명의 부총참모장이 편제돼 있는데, 이중 정찰국장은 부총참모장 중에서도 가장 막내급이 맡았을 정도였다.
김정일은 2009년 2월, 이 공작기관 통·폐합 명분으로 ‘작전반경 확대’를 내세운다. 2013년 5월경 필자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윗선에선 이 조직개편의 이유에 대해 ‘기존 정찰국의 활동반경은 이남 100km에 불과했지만, 장거리미사일 등이 전진 배치된 북한 인민군의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필요한 경우 남한 전 지역은 물론 일본과 미국의 해외까지 작전반경으로 둬야 한다. 이 때문에 정찰국의 확대와 타 기관의 흡수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내세웠다고 한다. 장거리 핵미사일 개발로 인해 군의 작전반경이 해외로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는 오극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김정일은 군에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오극렬이 아들 정은에게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을지 믿음을 줄 수 없었다. 이런 저런 명분을 통해 결국 오극렬의 권력기반이었던 작전부에 손을 댐으로써 위험요소를 제거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후 2009년 4월 오극렬은 갑자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되는 계기를 맞이하나 실제 군에 대한 영향력은 훨씬 약해지게 된다.
작전부 통·폐합의 반사이익으로 기존의 군 정찰국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강력한 비밀공작기관인 ‘정찰총국’으로 거듭난다. 총참모부 막내급 부총참모장 소관이었던 정찰국이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김정은 시대의 상징과 같은 주요 권력기관으로 개편된다. 당적으로는 중앙당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제1부부장과 정찰총국 담당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부부장의 지시를, 거시적으로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지도를 받고 행정적으로는 국방위원회 직속 부서로 지위가 격상된다. 그리하여 이따금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으로 대남도발적인 발언들을 일삼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편된 정찰총국은 6개국과 1개의 전문 경보병군단(11군단)과 각 군단 정찰대대 및 경보병 여단들이 산하로 확대되었다. 즉 기존의 당 작전부는 편제 그대로 1국(작전국)으로, 기존의 인민무력부 정찰국은 그대로 2국(정찰국)으로, 3국은 기존 작전부 기밀 및 통신부서인 414연락소를 모체로 암호·통신·도청·사이버해킹 등 유무선 통신 분야를 전담하는 부서로, 기존의 당 35호실을 모체로 5국(해외정보국)으로, 기존 정찰국과 작전부 및 대외연락부 내 전략 및 모략 부서들을 통폐합하여 대남 및 대미 군사회담을 전담하는 전략부서를 6국(정책국)으로, 기존 정찰국과 각 부서들의 후방부서들을 통폐합하여 7국(후방지원국)으로 개편되었다.
정찰총국은 이렇게 비대화되어 북한 군부의 비정규 특수무력 20만여 명을 산하에 두게 됐다. 유사시 실제로 적대국 지역, 특히 대남 비정규 특수전을 대비할 수 있는 기관으로 전격적으로 개편되었다.
결과적으로 김정은 시대 들어 오극렬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면, 새롭게 거듭난 정찰총국의 초대 총국장에 오른 김영철은 새로운 시대의 핵심인사로 등극한다. 이전 정찰국장의 경우 중장(우리식으로 소장)이나 상장(우리 식으로 중장)급 이하 간부가 주로 맡았지만, 정찰총국장 김영철은 대장 계급을 받게 된다.
정찰총국을 책임지게 된 김영철은 국내에도 알려진 인물이다.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나온 김영철은 1968년 인민군 소좌시절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연락장교’로 투입됐던 이력의 소유자다. 또한 1989년 2월부터 1990년 7월까지 남북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 북측대표(1~8차)를,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1~8차)를, 1992년 3월부터 8월까지는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원회 북측위원장(1~7차)을 지냈다. 2000년 4월엔 남북정상회담 의전경호 실무자접촉 수석대표를 지냈으며 2006년 3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북측대표를 지냈을 만큼 남한과도 인연이 깊다.
다만 내부 정보에 따르면, 김영철은 남측과의 회담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뿐 정찰국 시절, 단 한 번도 해외 무관 경력이 없었을 정도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런 그를 처음 발탁한 것은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1993년경에 남북고위급 회담 군사부분 회의에 참가하여 북측 수석대표였던 김영철의 회담 전 과정을 관찰하면서 당시 김영철(대좌: 우리식으로 대령)이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면서 김정일에게 ‘인재’라고 말했다. 때문에 이후 1993년 7월 소장으로 승진하게 되나, 사실상 김영철은 어머니 쪽 출신이 신분적으로 안 좋아, 능력은 출중하나 승진하지 못하던 케이스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 본인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아첨하거나 그러한 승진 분위기를 연출할 정도의 사교능력도 없는 고지식한 작전전문형 인물이었다. 김정은 역시 이러한 김영철을 눈여겨봤고, 아버지에게 초대 작전총국장으로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2009년 본격 등장한 정찰총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남한에 대한 북측의 ‘사이버테러’다. 실제 김영철의 정찰총국은 부서 개편 이후 해외 소재지에 전문 요원들을 투입해 각종 사이버테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북한의 당과 내각 군의 각 부서는 사이버 요원을 두고 해킹과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는데, 이러한 북한 각 기관의 사이버 해킹활동을 지도 및 관리하는 역할도 정찰총국 3국이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원봉기술무역회사’라는 간판으로 전문 소프트웨어 기술무역회사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필자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정은은 현재 정찰총국의 주·일 보고서를 직접 챙기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정찰총국에서 매주 목요일에 올라오는 ‘종합보고서’는 다른 그 어떤 기관들의 정보 보고서와 비교해 가장 신뢰한다는 후문이다. 정찰총국의 해당 보고서에는 남한, 일본, 미국 등 작전지역 내 군 관련 정보뿐 아니라 민간기관, 행정기관, 내부 동향 등 다채로운 정보가 총망라돼 있다. 보고서의 내용과 범위를 놓고 볼 때, 정찰총국의 활동 범위가 김정은 시대 유독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작전부·35호실 요원 불만 폭발 하급기관에 편제 ‘부글’ 기존의 군 정찰국 성원들과 섞이지 않은 채, 조직 자체가 통째로 옮겨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 관련 보고서도 때에 따라 직접 김정은에게 직접 보고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서로 경쟁 및 갈등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중앙당 한 개 부서로 작전부와 35호실 출신 조직원들은 정찰총국으로의 통·폐합에 엄청나게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어찌됐건 기존의 작전부와 35호실 조직원들 입장에선 자신들보다 격이 한층 낮았던 군의 하급기관에 편제돼 군의 지휘를 받게 됐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게다가 정보 및 공작임무 자체가 딱딱하기 그지없는 군 조직 성격과는 잘 맞지 않다는 것. 한 마디로 군 조직 내에선 유연한 사고와 창의적인 작전 기획 자체가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 앞서 당 출신 해외정보요원들의 불만이다. [걸] |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