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을 살해한 뒤 야산에 암매장하고 명의를 도용해 대출까지 받은 ‘작업대출’ 일당이 지난 7일 전북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믿기 힘들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8월 전북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상한’ 첩보를 입수했다. “10명 이상의 일당이 모텔에 한 명을 감금하고 폭행·고문을 한 뒤, 그의 명의로 대출을 받아 빼앗았다”는 것. 첩보가 날아들어 올 때까지 해당 내용에 대해선 신고조차 없었다. 범죄 수법도 낯설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전북청 광수대는 곧바로 피해자로 지목된 전 아무개 씨(27)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망설이며 조사를 거부하던 전 씨는 광수대의 긴 설득에 지난 9월 초 가족과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당시의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전 씨에게 악몽 같은 열흘이 시작된 것은 지난 8월 3일이지만 실질적인 시작은 하루 전인 2일 늦은 밤부터였다. 그날 밤 여대생 강 아무개 씨(27)가 전 씨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보고 싶다. 한 번 만나자”고 말했고 전 씨는 쾌히 승낙했다. 전 씨는 그동안 친구들과 함께 가진 술자리에서 중학교 동창의 친구인 강 씨를 몇 차례 만났다. 둘은 친구 여럿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
그렇게 2일 밤 늦은 시간에 만난 두 사람은 전북 전주 시내의 약속 장소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간혹 강 씨가 전 씨에게 “빚은 있느냐, 신용 등급은 어떻냐”는 질문을 했지만, 전 씨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함께 드라이브를 하러 나갔다. 둘을 실은 차는 지난 8월 3일 새벽 5시께, 경남 진주에 도착했다. 강 씨는 전 씨에게 “피곤하고 운전도 오래 했으니 잠깐 쉬었다 가자”며 한 모텔을 가리켰다. 술과 잠에 취해 몽롱했던 전 씨는 강 씨를 따라 해당 모텔로 들어섰다. 8월 3일 아침, 그렇게 전 씨의 악몽 같은 열흘이 시작됐다.
그날 오전 11시께 강 씨가 갑자기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강 씨가 아닌 낯선 남자 10명이었다. 이들은 전 씨를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 수차례 전 씨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빼는가 하면, 피우던 담배를 전 씨 발등에 비벼 끄기도 했다. 폭행과 가혹행위는 이날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이들은 전 씨의 소지품과 휴대폰을 빼앗았고, 신분증과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했다. 겁에 질린 전 씨는 순순히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넘겨줬다.
이후 전 씨는 이들에게 전국 곳곳을 끌려 다녔다. 한 번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치려 했지만, 바로 제지를 당해 또 폭행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전 씨가 풀려난 건 열흘 뒤인 지난 8월 13일. 얼굴의 멍이 어느 정도 사라졌을 때였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경찰 신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전 씨가 기억하는 것은 일당 11명 중 앞서의 여대생 강 씨와 남자친구 신 아무개 씨(25)의 이름뿐이었다. 이 사건을 처음부터 담당한 전북 광수대 장민 경위는 “전 씨의 진술을 토대로 신원조회를 통해 같은 또래부터 5살 차이가 나는 비슷한 이름을 검색해 사진을 출력했다”고 말했다.
자료는 광범위했다. 광수대는 출력한 사진 한 장 한 장을 전 씨에게 보여주며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강 씨와 신 씨의 신원이 밝혀졌다. 동시에 이들의 신원조회 자료를 통해 휴대전화 가입 사실을 확인했다. 전 씨가 납치, 감금 됐던 경남 진주 등의 지역 기지국을 찾아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요청해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진 착발신 내역 등 수사로 강 씨, 신 씨와 자주 전화 통화를 한 7~8명의 전화번호도 특정했다. 이들은 한 사람당 휴대전화를 9~10대씩이나 개통해 사용하고 있었다. 광수대는 이들 8명 중 확실하게 확인된 4명에 대해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 받았다.
그런데 통화 분석 중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앞서의 장민 경위는 “특이한 번호가 하나 더 있었다. 특정 일시부터 착발신 내역이 끊겼고, 이후 나타난 발신 내용은 이전 통화 내역과 달리 은행이나 대부업체와 통화한 사실뿐이었다. 이 사람도 일당 중 한 명일 것으로 보고 신원조회 후 사진을 출력해 전 씨에게 보여줬다. 하지만 전 씨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광수대는 수상했지만 사건과 특별히 관련이 없는 듯해 참고인으로 해당 인물을 경찰 전산에 입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지난 9월 초 실종신고가 접수된 조 아무개 씨(25)였다.
앞서의 장 경위는 “실종 시점 이후에 조 씨가 4550만 원을 대출 받은 기록이 나왔고, 휴대폰이 새로 개통된 사실까지 확인되자 더 큰 강력 사건과 연관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전 씨에게 사진 대신 이름을 가르쳐 주며 ‘들어본 적 있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전 씨는 그 이름을 “들어 봤다”고 대답했다. 풀려난 이후 피의자들을 한 번 더 만난 자리에서, 이들이 “조 씨의 명의로 대출이 됐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봤다는 것.
광수대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장 경위는 “체포영장을 발부한 20대 연인 강 씨와 신 씨에 대해 휴대전화 실시간 위치 추적을 한 결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2인 1조로 팀을 구성해 총 네 명이 서울로 올라가 잠복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실시간 위치추적은 공중에서 2km 반경까지 추적된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집과 상점들이 있다. 범인들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검거할 수 없어 답답했다”고 말했다.
광수대는 강 씨와 전 씨는 위치추적과 기지국 통신 수사를 통해 네 개의 기지국이 위치한 지역까지 범위를 좁혀갔다. 범인은 반경 2㎞내에 있었고, 그 이상은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강 씨와 전 씨의 움직임이 포착될 때마다 주변 모텔부터 피시방, 만화방 등을 돌아다니며 탐문 수사를 했고, 해당 지역 내 거의 모든 CCTV를 확인했다. 그리고 서울 잠복 수사 나흘째인 지난 10월 3일 오전 5시 36분께, 광수대는 한 피시방에서 이들을 검거했다.
하지만 사건이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앞서의 실종된 조 씨의 행방을 알아야 했다. 광수대는 검거 즉시 강 씨와 신 씨를 분리했고, 각각 사라진 조 씨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조 씨를 살해 후 암매장했다”고 대답했다. 이들이 사체를 유기했다고 지목한 곳은 경상남도 함양의 한 야산. 조 씨로 추정되는 사체는 해당 장소에서 백골이 된 채로 발견됐다. 경찰은 현재 이 사체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원에 DNA 감정의뢰를 신청한 상태다.
이후 지난 10월 4일과 5일에 걸쳐 전북청 광역수사대 형사 전원이 전국으로 흩어졌다. 나머지 일당 9명을 검거하기 위해서였다. 대구에서 2명, 경산에서 1명, 진주 6명이 검거됐다. 이 가운데에는 미성년자도 5명이나 됐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학교 동창과 사회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불법 ‘작업대출’ 작업을 위해 자연스레 모였다. 자신들이 빌린 대출금을 갚고 생활비와 유흥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작업대출을 했지만 모집이 여의치 않자 지인들을 유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일당은 숨진 조 씨에게 더 대담한 범행을 저질렀다. 조 씨를 만나기 전부터 살인하기로 공모했던 것. 조 씨와 피의자 신 씨는 고등학교 동창사이다. 신 씨가 “예전에 신세진 것도 있고 오랜만에 보고 술도 한잔 하자”며 조 씨를 유인해 지난 8월 24일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조 씨의 직장과 신용 등급을 물었고, 이후 조 씨가 대출을 거부하자 지난 8월 25일 2시 40분께 경기도 안산 인근 도로에서 자신들이 타고 다니던 렌터카 안에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미리 알아뒀던 경남 함양군 야산으로 이동해 시신을 매장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숨진 조 씨의 신분증을 도용해 제3금융권으로부터 4550만 원을 대출 받았다. 조 씨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 대출 규모가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휴대폰 내구제’ 수법으로 100만 원가량을 강취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 일당은 SNS메신저로 안부를 물어오는 조 씨 어머니의 메시지에 조 씨인 척하며 대화까지 나눈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피해자들의 신용등급을 노린 이유는 제3, 4금융이 이자율이 높은 대신 대출 절차가 간단한 점을 악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피해자들의 신분증 등을 이용해 주민등록 등초본, 병적증명서 등의 서류를 준비하고, 가짜 직장 등을 미리 만들어 대출을 신청했다. 대출 업체에서 전화 확인을 하면 “자신이 맞다”며 사칭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지난 7일 피의자 강 씨와 신 씨 등 강도, 살인, 사체유기, 공동 감금, 살인 예비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나머지 7명은 강도 상해, 공동 감금 혐의로 송치되며 수사가 마무리됐다.
장민 경위는 “피해자 전 씨는 현재 한 대학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아직도 혼자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는 등 사건에 대한 충격이 커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조 씨의 가족에게는 실종 이후부터 지금까지 조 씨 명의의 대출금을 갚으라는 독촉장과 휴대폰 요금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장민 경위는 “이 소식을 듣고 피해자 가족들을 두 번 울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해당 업체 등에 공문을 보내 협조 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작업대출 일당 검거 뒷얘기 1인당 휴대폰 10대씩 사용…통화내역 이 잡듯 뒤졌다 “(경상남도)함양에다 묻었지?” “…담배 하나 주세요.” 장민 경위 그는 “오로지 감으로 질문했다. 이 질문이 없었으면 이들의 자백은 더 늦었을 거고, 숨진 피해자를 찾는 시간은 더 지연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방대한 통화내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경남 함양에 통화 내역이 찍힌 때가 있었다. 그 사실을 기억해 뒀다가 질문을 던졌더니 피의자들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깜짝 놀랐다. 여기까지 확인하고 정식 조사를 하러 전주로 데려왔다”고 전했다. 이후 일당 9명이 줄줄이 검거됐다. 장 경위에 따르면 이 사건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고 했다. 그는 “최초 사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피해자 전 씨에게 전화를 걸어 조사를 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경찰서에 나와 진술을 했으나, 이후 피의자들을 한 번 더 만났는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진술을 취소하겠다’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긴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고, 결국 가족과 함께 경찰서에 나와 자세한 피해 사실에 대한 진술을 했다”고 말했다. 전국 곳곳을 누비며 돌아다닌 일당을 추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범위한 지역과 방대한 통신 자료를 분석해야 했던 것. 휴대폰도 한 대만 사용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장 경위는 또 피의자 신 씨와 강 씨 검거를 위해 서울에서 잠복 수사를 할 때를 떠올리며 “기지국 통신 수사, 실시간 위치 추적 등으로 피의자들의 행적에 대한 틀은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세부적인 위치는 발로 뛰어서 찾아내야 한다. 피의자들이 이 근처를 거닐고 있는데도 검거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답답했다”고 말했다. 그는 “피의자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범행에 옮겼다. 사체를 유기한 지점이 등산로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왕래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는 것을 볼 때 미리 사전 답사까지 마친 것으로 보인다”며 “끝까지 검거하겠다는 생각으로 방대한 자료를 들고 전국 곳곳을 돌았다”고 말했다. [문] |
신종 금융범죄 ‘휴대폰 내구제’ 아시나요 남의 명의로 할부 구입 후 즉시 되팔아 목돈 가로채 전북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공개한 작업대출 범죄 증거품. 연합뉴스 ‘휴대폰 내구제’는 신종 용어다. 여기서 ‘내구제’란 “스스로 나를 구제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특정 휴대폰 등을 할부로 구매한 뒤, 바로 중고 시세로 되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방식을 말한다. 경찰에 따르면 휴대폰은 신용불량자가 아니거나 미납금, 연체금 등이 없으면 1인 당 1~4회선까지 할부로 개통이 가능하다. 이를 이용해 중고 시세가 좋은 기종을 개통하고 유심 칩을 제거해 빈 기계를 박스째로 되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한다. 정상적인 휴대폰 대리점은 개통과 매입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 이번에 검거된 일당 11명은 이 수법을 악용, 피해자들의 명의를 도용해 시가 100만 원 상당의 휴대폰을 개통하고 그대로 되팔아 50만~60만원가량에 판매해 강취했다. ‘작업대출’이란 대출이 되지 않는 신용불량자 등을 대상으로 서류를 위조해 대출이 가능한 신분으로 바꿔주는 것을 말한다. 작업대출 일당은 조작한 서류로 제3, 4금융 등에 대출을 신청해 주고, 해당 대출 금액에서 수수료 30~40%가량을 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의 일당 중 강 씨와 신 씨 등 4명은 각각 서류 위조 담당, 가짜 직장 담당, 모집 담당 등을 맡았다. 작업대출을 하며 수수료를 떼고 이를 각자 나눠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