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의원이 추석연휴 직후부터 자신의 지역구가 있는 대구에서 정치행보를 펼치고 있어 관심을 받고 있다. 유 의원이 10월 16일 오후 대구시 중구 계산동 계산성당에서 ‘대구, 개혁의 중심이 되자’란 주제로 특강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생각해 보겠다’는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유 의원은 이 전 의원을 만난 그 이튿날 지역 언론인과의 간담회에서 “TK(대구·경북) 등 특정 지역이 당헌당규상의 우선공천지역이 되니 안 되니 떠드는 것 자체가 한심한 얘기 같다”, “18대 총선의 보복정치, 19대의 보복정치가 또 가면 새누리당이 후퇴할거다”, “대구 12곳 중 7곳이 초선 지역구인데 이게 또 초선으로 물갈이되면 대구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 등 공천과 관련한 입장을 숨기지 않았다. 발언의 수위는 높았다.
왜 주목도가 크지 않은 지역 언론을 통해 뜻을 밝혔는지에 대해 유 의원과 가까운 한 의원은 “지역민이 있는 지역 언론과는 소통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11년 최고위원 사퇴 이후부터 지난 2월 원내대표 경선에 나서기 전 칩거 기간에도 지역 언론과는 꾸준히 스킨십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여하튼 유 의원은 전국 어디든 우선추천지역이 될 수 있다는 친박계와 약세지역이나 사회적 약자의 등용이 필요한 지역에서만 우선추천이 가능하다는 비박계 사이에서 ‘비박계 편에 서겠다’는 뜻을 지역민에게 알린 것이다. 물론 공천룰에 국한해서다. 정치권 동향에 밝은 한 인사는 “유 의원의 정치사상이나 정치철학은 김 대표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다만 공천룰에 대해서만큼은 김 대표의 뜻과 일치한다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정가의 다른 소식통도 “김 대표의 여야 동시 오픈프라이머리, 즉 여야가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와 명분은 아주 올바른 것으로, 이에 대해선 정의화 국회의장도 유 의원도 다 공감하는 것 같다”면서 “유 의원이 김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면 공천룰 싸움은 친박계가 아무리 청와대를 끼고 나서더라도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의장도 최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김 대표의 상향식 공천에 찬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새누리당이 집단지도체제이고 최고위원회의가 최고 의사결정기구지만 국회의원 자신들에게 적용될 공천룰은 의원총회를 거쳐야 한다. 유 의원도 의총을 통해 원내대표에 당선됐고 의총을 거쳐 사퇴를 결정한 바 있다. 현재 당 159명 의원 중 친박계는 60명 안팎으로 분류된다. 나머지 다수가 김무성계, 유승민계, 친이계를 포함한 범비박, 중립소신파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과거 당내 경선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앞서의 소식통은 “K(김무성)-Y(유승민)라인이 재결합해 공천룰 헤게모니 싸움에 나서면 친박계의 뜻이 꼭 관철되리란 보장이 없다”고 분석했다. 항간에서 말하는 친박계의 전략공천은 물 건너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난 16일 계산성당 특강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좀 있다. 당초 유 의원과 주변부는 이날 특강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 고민했고 유 의원도 현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공감대를 모았다고 한다. 원내대표 출마선언문, 4월의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7월의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문에 준할 정도의 ‘고강도’ 보수 개혁을 말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 중이었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여야가 대치중인 상황에서 집안싸움으로 읽히는 행보를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해 수위를 낮췄다고 한다. 본래 집안싸움이 한창이어도 외부에서 적이 쳐들어오면 연대해야만 집안이 돌아가는 것이다. 실제 국회를 출입하는 전 매체가 대구 계산성당으로 기자들을 급파하려 했지만 유 의원의 ‘톤다운’이 알려지면서 일부가 취소했고 20여 명의 기자들만 유 의원을 따라붙었다고 한다.
지역 정가의 한 관계자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있어서 유 의원을 향한 팬심을 확인했다”면서 “당연히 유승민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니 호응이 좋았지만 권영진 대구시장이나 우동기 대구시교육감 등도 참여한 릴레이 특강 형식이었는데 만석이 된 사례가 처음이라 다음날 지역 언론에서는 좀 비중 있게 다뤘다”고 전했다.
톤을 낮췄음에도 유 의원은 당시 특강에서 “제가 요즘 시련을 조금 겪고 있다”며 TK 물갈이설, 공천탈락설, 청와대 차출설 등에 대한 불편함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제가 말하는 용감한 개혁은 당의 노선과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 “자신을 먼저 닦고 세상에 나와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이 영남사림의 기본정신으로 임금도 예외 없이 수기치인을 해야 하는 존재”, “영남사림은 개혁적 DNA를 가지고 있고 이런 피를 가지고 우리가 대한민국 역사를 움직여 왔다” 등의 대구 개혁, 보수 개혁을 주창했다.
“대한민국 건국 69년 중 39년 동안 대구·경북이 배출한 지도자가 이끌어왔다. 잘된 것에 대한 프라이드는 느껴야하지만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TK가 개혁의 중심이 되자.”
이날 특강의 핵심은 이 문장이었다고 유 의원 측근은 설명했다. 이 측근은 “새로운 보수란 안보는 정통보수, 민생은 진취적인 중도개혁, 정치사회는 통합으로 가야 한다는 게 유 의원의 철학으로 이 부분에 있어서 뜻을 같이 하는 분들도 꽤 있다”고 덧붙였다.
노출이 되고 있지 않지만 최근 유 의원은 원내대표 재임 때보다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회 의원회관에서도 분 단위로 사람이 찾아오고 오찬과 만찬을 통해 언론계, 학계, 경제계를 비롯해 뜻을 같이 하는 의원그룹과도 두루 소통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 중에는 현역 다선 의원들도 있고 개혁적 성향의 지방자치단체장을 비롯해 과거 뜻을 같이했던 정치적 동지들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대구의 한 초선 의원은 “유 의원이 말하는 따뜻한 보수나 개혁적 보수에 대해 공감하는 의원들이 많다. 결국 새누리당이나 보수 주류가 그 길로 가야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라며 “그러기 위해선 이번 정부가 꼭 성공해야 하며 유 의원도 누구보다 그걸 원하고 있다. (유 의원의) 말이 거칠어서그렇지…, 억양이나 표현보다는 내용을 봐야 하는데…”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유 의원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대구 계산성당 특강에서 그는 이런 말을 들려줬다.
“저는 이 자리에서, 성당에서 저는 절대 거짓말 안 합니다. 저는 정말 박근혜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입니다. 야당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치권에 와서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을 겪어보니까 대선에서 이기는 거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기고 나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몇 배나 더 어렵고 몇 배나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