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대형 쇼핑몰(오른쪽 위)서 농도 20% 염산을 구매할 수 있었다. 중고거래 장터(오른쪽 아래)에선 구매가 더 쉬웠다. 원 안 사진은 지난해 12월 수원서 발생 한 황산테러 현장.
염산은 농도 35%부터 ‘진한 염산’으로 불린다. 냄새부터 자극적인데 그 연기를 마시는 것 자체로 호흡 곤란을 일으킬 수 있다. 피부와 눈에 닿을 경우 심한 화상과 실명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
그런데 최근 일부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서 이러한 고농도 염산을 팔아온 정황이 포착돼 논란이 됐다. 문제의 상품은 ‘왕수 제조 세트’다. 왕수란 진한 질산과 진한 염산을 혼합해 만든 용액으로 금과 백금 같은 귀금속도 녹일 수 있다. 이곳에서 판매된 왕수는 농도 35%의 염산, 68%의 질산을 혼합해 만들었다. 또 다른 온라인 쇼핑몰도 지난 13일까지 20% 농도의 염산 1㎏을 판매했다. “대형 온라인 쇼핑몰이 유해물질을 농도 구분 없이 판매한다”는 논란이 확산되면서 현재는 관련 대형 온라인 쇼핑몰들이 판매를 금지했다.
현행 화학물질관리법을 보면 황산 등의 화학물질을 구매할 때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하며 따로 이름, 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날짜, 사인 등을 기재해야 한다. 판매자는 판매 물질의 종류 및 양을 기록해 3년 이상 보관해야 한다. 실험용으로 쓴다 하더라도 개인이 직접 구매하기 어려운 절차다. 온라인 거래에서도 해당 절차를 지켜야 하며, 만약 화학물질 표시법을 위반했을 경우 5000만 원 이하의 벌금과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까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온라인 대형 쇼핑몰에서 이런 위험 화학물질의 구매가 가능했다. 지금은 온라인 대형 쇼핑몰에서 판매가 금지됐지만은 여전히 일부 온라인 화공약품점에선 이런 절차 없이 유해화학물질을 구할 수 있다. 지난 21일 기자가 한 온라인 화공약품 회사에 황산과 염산 등 강산성 물질 배송을 문의하자 업체 관계자는 “배달은 안 되지만 방문 구매는 가능하다”며 “주민번호만 적으면 된다”고 답했다. 본인을 증명할 서류를 따로 갖고 올 필요는 없다고 한다. 거짓 번호를 적어도 확인할 길이 없는 셈이다. 또 다른 온라인 화공약품점 관계자는 “실험용이라면 배송도 해줄 수 있고, 소량은 개인에게 판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유해물질 구매 절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오프라인 화공약품점에서 직접 구매한 염산과 황산. ‘유해물질’이란 표기는 찾아 볼 수 없다.
온라인뿐만 아니라 일부 오프라인 판매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저농도 염산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약국을 찾았다. 대부분의 약국에서는 “식약처의 권고 사항도 있고, 악용 사례가 종종 생겨 약국에서 더 이상 염산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자가 방문한 서울 종로구의 한 약국에서는 “요새 염산 찾는 사람 많이 없는데…”라고 말을 흐리며 빨간색 통을 꺼냈다. “녹 제거용으로 쓰려고 한다”고 대답하자 “청소용 세제가 많이 나와서 위험하게 염산을 쓸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1500원을 건네자 어느새 농도 9.9%짜리 염산 400㎖가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일부 오프라인 화공약품점에서도 아무런 절차 없이 염산과 황산의 구매가 가능했다. 지난 21일 기자가 직접 화공약품점이 모여 있는 서울 종로구의 한 시장을 찾았다. 대부분의 화공약품판매점은 구입 용도를 묻고 앞서의 구매 절차를 거치기 위한 관련 서류를 요구했다. “가져오지 않았다” 또는 “나중에 가져다 주겠다”고 말하면 판매를 거절했다.
그런데 A 화공약품점에서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리 해당 화공약품점의 약도를 적어두고 이를 살피는 모습을 보이며 조심스레 “염산을 사러왔다”고 말하자 대뜸 “실험용으로 쓰냐”고 물었다. “실험용으로 소량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자, 구석에서 400㎖ 용량의 빨간 통을 꺼내왔다. 그리고 농도 20% 염산을 해당 통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판매자가 꺼낸 통은 일반 약국 등에서 구매할 수 있는 농도 9.9%의 염산을 담는 통이었다.
B 화공약품점에는 복장을 바꿔 입고 들어갔다. 셔츠 대신 반팔 티셔츠를 입고 목장갑을 끼우고 바지를 접어 인근에서 ‘작업’을 하는 모습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도 “염산을 사러 왔다”고 말하자, 판매자는 용도도 묻지 않고 얼마나 필요한지부터 물었다. “하나만 달라”고 대답하자, 앞서의 판매자와 같이 1L 용량의 하얀 플라스틱 통을 꺼내 염산을 옮겨 담았다. 계산을 하고 문을 나서자 판매자는 “낮엔 많이 덥다”며 “고생하라”고 말했다. 인근의 C 화공약품점에선 같은 방식으로 황산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날 기자는 서울에 위치한 화공약품점 20여 곳을 방문했다. 이 가운데 3곳에서 유해화학물질을 아무런 절차 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해당 화공약품점에는 ‘유독물 판매업소’ ‘유독물 구입 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여 주십시오’라는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었지만, 판매자들은 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판매자들이 염산과 황산을 옮겨준 통에는 경고 문구는 물론, 염산 또는 황산이라는 표기조차 없었다.
유해물질에 대한 악용 사례가 늘고 유통과정에서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최근 환경부는 앞서의 대형 쇼핑몰 등 온라인 전수조사에 나섰다. 환경부 화학안전과 관계자는 “대형 온라인 쇼핑몰부터 중고 거래 사이트까지 판매자를 역추적하고 있다. 허가를 받은 판매자인지, 판매 절차를 지켰는지 조사할 것”이라며 “일부 오프라인 판매점에서도 관련 법규를 어기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주기적인 단속으로 이를 적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