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지난 16일 롯데호텔 34층 집무실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신격호 총괄회장,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민유성 SDJ코퍼레이션 고문,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 연합뉴스
지난 1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의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집무실이 공개되면서 신 총괄회장의 심신 상태가 롯데그룹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의 주요 사안으로 본격 부각됐다. 집무실과 함께 신 총괄회장이 신동주 회장, 민유성 SDJ코퍼레이션 고문 등과 함께하며 간단히 질의응답하는 영상도 공개됐다.
이날 공개는 신동주 회장의 주도로 이뤄졌으며 신 총괄회장의 건강과 심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신동주 회장이 아버지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위임서’, ‘지시서’ 등이 큰 효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 쪽은 94세의 신 총괄회장의 판단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동주 회장이 주장하는 총괄회장님의 진의도 의심스럽지만 경영권이 개인 의사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신 총괄회장의 뜻이 아니라 이사회와 주주 지지 등으로 결정된다는 얘기다.
신동주 회장은 줄기차게 신 총괄회장의 뜻을 내세우고 있다. 위임서와 지시서, 통고서 등을 근거로 ‘후계자로 장남을 선택했다’는 것은 물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의 총괄회장 집무실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섰다. 나아가 롯데그룹 계열사의 업무보고를 요구했다.
지난 19일에는 신 총괄회장의 비서실장 이일민 전무를 해임하고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나승기 변호사를 신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은 즉각 “그룹 임원인사는 내부 절차를 따라야 하는데 신 전 부회장 측의 일방적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며 이 전무 해임이 무효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신동주 회장 쪽은 “인사 규정에 따른 해고가 아니라 비서실장으로서 직위에서 해임한 것뿐”이라며 “인사 규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고 맞섰다.
형제 간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는 가운데 적잖은 시선은 양쪽 주장과 처사의 법적 효력 이전에 신 총괄회장의 건강 상태로 향해 있다. 신동주 회장은 지난 19일 아버지와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건강검진을 통해 신 총괄회장의 심신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신동주 회장 측은 병원 내원 이후 “건강하다는 결과를 들었다”고 알렸다.
하지만 다음날인 20일 서울대병원이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에 대해 어떤 코멘트도 한 적이 없다”고 밝힘으로써 신동주 회장 측 발표에 신뢰성이 떨어졌다. 오히려 “94세의 고령으로 쇠약해져 있다”며 판단력과 진의에 의문을 제기해오던 신동빈 회장 쪽 주장에 힘이 실리는 꼴이 됐다. 신동주 회장 측이 “‘건강하시다’는 주치의의 단순 코멘트였으며 서울대병원 소견서는 아니었다”고 발을 빼자 이마저도 서울대병원은 “(건강하다는 말은) 환자에 대한 인사치레”로 치부했다.
지난 16일 공개한 신 총괄회장의 모습과 질의응답 광경에서도 신 총괄회장의 의중이 불분명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날 신 총괄회장은 “장남이 (후계 경영) 하는 게 맞다”면서도 “당장 후계자 선정이 중요한 게 아니며 10년, 20년 더 일을 할 생각”이라면서 후계자 선정보다 본인의 경영 의지를 내비쳤다. 신 총괄회장은 또 신동빈 회장이 용서를 빈다면 “당연히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 총괄회장의 이 같은 발언은 그동안 신동주 회장 측이 주장해오던 아버지의 완강한 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비쳤다.
재계 관계자는 “신동주 회장이 앞세우는 ‘아버지 뜻’이 큰 무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신 총괄회장의 건강과 진의를 명확히 전달해야 한다”며 “신 총괄회장의 건강과 관련해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모습을 계속 보일 경우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동주 회장이 불리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2일 신동주 회장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 후계자로서 지위를 다 내려놓고 동생과 타협점을 찾아보겠다”며 “내가 일본 롯데를, 동생이 한국 롯데를 경영하는 예전 구도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은 “진실을 숨기고 국민을 호도하는 행위”라며 “신동빈 회장은 이미 여러 차례 언제든 화해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지만 가족 문제와 경영은 분리돼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