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6일 자정. A 씨(46)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단단히 화가 난 그가 찾은 곳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한 가정집. 현관에 들어섰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어두컴컴한 거실뿐이었다.
A 씨가 들어간 곳은 그동안 만나오던 B 씨의 집이었다. B 씨는 최근 며칠간 그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B 씨. A 씨는 참을 수 없었다. 집안에 있던 옷과 가재도구 등을 던지며 소란을 피웠다.
같은 날 새벽 5시 30분께. B 씨의 딸이자 이 사건의 피해자인 C 씨(22)가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가재도구를 보고 영문을 몰라 당황한 C 씨. 그가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A 씨는 C 씨의 멱살을 잡고 안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A 씨는 “움직이지 마라. 엄마가 오면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A 씨는 테이프와 철제 옷걸이 등으로 C 씨를 결박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께에는 양 손목을 등 뒤로 묶었고, 도망치지 못 하도록 양 발목도 결박했다. 소리치며 저항하는 C 씨를 막기 위해 수건을 입에 넣고 테이프로 감아 방에 가뒀다.
감금은 끝이 아니었다. A 씨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꼼짝 못하던 C 씨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결박한 상태라 옷이 벗겨지지 않자 가위를 꺼내 들었고, C 씨의 티셔츠와 바지, 속옷을 차례로 잘랐다. 다리에 감았던 테이프까지 끊은 A 씨는 이후 2시간 동안 피해자의 엉덩이에도 손을 대는 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범행 이후 A 씨는 C 씨를 방 안에 가두고 문을 잠갔다. 같은 날 오후 4시께 B 씨가 집으로 돌아왔다. B 씨는 당시 C 씨가 당한 끔찍한 일을 눈치 채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B 씨는 경찰 조사에서 “A 씨는 딸(C 씨)과 비슷한 또래의 두 딸이 있어 설마 그런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와 B 씨가 문 밖에서 다투는 동안, 방 안에 갇혀있던 C 씨는 컴퓨터를 켜고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후 5시 40분께 C 씨의 친구가 경찰에 신고했고, 이를 접수한 경찰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박경수 안산 단원서 여성청소년계 2팀장은 <일요신문>과 만나 “집안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긴박했다. A 씨를 그 자리에서 감금·특수강간 혐의로 긴급체포했다”고 말했다.
최초 경찰 조사에서 A 씨는 “합의 하에 관계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경찰이 “그렇다면 결박은 왜 했는가”라고 묻자 그제야 범행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A 씨는 또 “두 딸에게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찾아내 죽여버리겠다”고 대답했다. 경찰이 “그러면서 왜 범행을 저질렀는가”라고 묻자 “잘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또 “B 씨의 집에 들어가기 전 소주 5병을 마신 상태였고, 이후 피해자를 감금한 10시간 동안 소주 3병을 더 마셨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앞서의 박 팀장은 “체포 당시 A 씨는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며 “조사 이후 범행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검찰도 경찰 판단과 비슷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A 씨는 피의자 심문(영장실질검사)를 마친 다음날인 12월 27일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애인 딸 감금 성폭행 사건의 판결을 보도한 MBN 뉴스 캡처.
그런데 A 씨는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고 그 자리에서 풀려났다. 1심 법원은 “피고인의 범행으로 이제 갓 20대 초반에 접어든 피해자는 정신적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커다란 충격 및 고통을 받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에 비춰 피고인의 죄책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도 “술을 마시고 흥분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점,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점, 원만히 합의한 점, 초범인 점 등 유리한 정상도 나타난다”며 A 씨에게 앞서의 형을 선고했다. 검찰은 곧바로 항소했지만 2심 법원 역시 A 씨가 피해자에게 공탁금을 준 점 등을 들며 “이유 없음”으로 기각했다.
성범죄자에게 통상 내려지는 신상공개 명령도 없었다. 1심 법원은 “피고인 A 씨의 나이, 직업, 환경, 가족관계 등을 볼 때 신상정보 공개 명령으로 인해 기대되는 이익 및 예방효과와 불이익 및 부작용 등을 비교해 보면 피고인의 신상정보를 공개·고지해서는 안 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A 씨의 1심 변호인은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됐다. 신상정보공개 명령이 없었던 것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A 씨는 1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두 차례에 걸쳐 수천만 원의 합의금을 내밀었다. 법원에 반성문도 총 29회 제출했다.
하지만 해당 판결에 대해 “최근 성범죄 처벌 추세에 비해 낮은 형이 구형 됐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조계 관계자는 “최근 성폭행 사범에 대해서는 엄한 처벌을 내리는 추세다. 이런 사건의 경우 보통 4년에서 5년 정도의 실형을 선고 받는다”고 말했다.
신상정보 공개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그는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특수한 사정’은 있다. 피고인의 연령, 직업, 재범위험성, 범행과정, 피해자의 피해 사실, 공개로써 피고인이 입을 불이익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으로 공개하지 않는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요신문> 취재 결과 A 씨의 판결과 비슷한 판례는 한 건이 있었다. 이 판례의 피고인은 24세의 대학생으로, 16세 소녀를 대상으로 강제추행 상해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법원은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범행한 점 △가족이 피고인을 돌보며 선도할 가능성이 있는 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점 등을 보고 신상공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A 씨의 ‘특별한 사정’과 비슷한 부분은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범행한 점’뿐이었다.
앞서의 법조계 관계자는 “최근에는 법원에서도 음주 때문에 감형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어 다른 사유들을 들어 감형하고 있는 추세다. A 씨의 판결과 같이 공탁, 초범, 합의 등의 사유로 여전히 일반 형사사건과 비슷한 잣대로 감경하는 경우가 많다”며 “가해자의 신변 보호 등 인권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는 점을 볼 때, 성범죄에 대한 감형이나 집행유예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법조계 고위 관계자는 <일요신문>에 “성범죄에 대한 일부 판결이 관대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사건을 법리적으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간혹 일반 정서와는 다른 판결이 나올 수 있다. 입법부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