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손발 묶고 강간했다”고 주장한 남편 A 씨가 검찰 조사에서 언급했던 영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스틸컷.
“예전에 봤던 사이코 영화가 떠올랐다. 거부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A 씨는 검찰 조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A 씨가 언급한 영화의 제목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루이스(멕 라이언)다. 잘나가는 변호사인 루이스는 남편 이안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범죄를 꾸민다.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온 이안을 기절시킨 뒤 테이프로 묶어버린다. 젊은 애인과 파리로 떠날 계획이었다는 이안의 ‘자백’을 받아낸 루이스는 도망치려는 이안을 다시 붙잡아 변기 위에 묶어둔다. A 씨가 마치 자신의 처지를 이안으로 비유한 것. 그는 “영화처럼 아내가 성관계 요구에 응할 때까지 나를 풀어주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옷이 벗겨져 온몸이 청테이프로 묶인 채 무기력하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과연 A 씨의 진술이 사실일까. 검찰 조사를 토대로 구성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01년 결혼한 A 씨 부부는 원래 영국에서 10년 넘게 생활해왔다. 하지만 2007년 아내 심 씨가 사기죄 등으로 처벌받으면서 부부 사이가 틀어졌다. 지난봄엔 영국 현지 경찰에 아내가 남편을 폭행했다는 신고가 접수된 적도 있었다. 4월부터 별거를 시작한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와 이혼을 하기로 했다.
5월 1일경 한국에 도착한 심 씨는 이혼을 위한 유리한 증거를 확보하고 싶었다. 남편 A 씨는 5월 6일 귀국했다. 심 씨는 지인 김 아무개 씨의 도움을 얻어 청테이프와 케이블 끈을 준비하고 그날 오전 11시경 A 씨를 서울시 종로구의 한 오피스텔로 불러냈다. A 씨가 오피스텔로 들어서자 심 씨는 청테이프로 A 씨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심 씨는 A 씨에게 “다른 여자가 있어 부인과 살고 싶지 않다”며 “이혼에 대한 책임은 전부 나한테 있다”고 말하도록 시킨 뒤 이 목소리를 녹음했다.
A 씨의 진술에 따르면 성폭행은 이튿날 새벽 1시경 벌어졌다. 심 씨가 갑자기 침대에 온몸이 묶여 움직일 수 없는 A 씨의 옷을 벗기고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성폭행을 당한 뒤에도 A 씨는 오후 4시까지 오피스텔에 갇혀 있었다. 무려 29시간 동안이나 A 씨는 공포에 떨었다. 당시 현장엔 심 씨와 A 씨만 있었다. 심 씨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A 씨는 바로 112로 신고해 감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심 씨에 대해 ‘혐의 없음’이란 결론을 내려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심 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검찰의 판단은 달랐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아내에게 성폭행당했다”는 A 씨의 진술이 신빙성이 높다고 본 것. 검찰은 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남편을 가두고 이혼 책임을 시인하도록 강요한 혐의로 심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동시에 검찰은 감금치상·강요·강간 혐의로 심 씨를 기소했다.
이번 사건의 관건은 이들 부부간의 성관계에 강제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다. 형법 제297조는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을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든 뒤 간음을 함으로써 성립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폭행 또는 협박은 ‘강제성’ 인정을 위한 핵심 요건이다. 이를 두고 양측의 변호사들은 치열한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심 씨의 변호사는 “심 씨는 성관계 당시 A 씨에 대한 포박을 풀어줬다”며 “A 씨가 애정표현을 하며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성관계를 요구해서 심 씨가 응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A 씨 측 변호사는 “심 씨가 A 씨를 침대에 묶었고 그 상태에서 성폭행당했다. 중간에 포박을 풀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고 반박 중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법원은 이와 유사한 사건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왔을까. 형법상 강간죄의 피해대상이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된 것이 불과 2년 전이다. 개정된 형법조항을 적용받아 기소된 여성은 전 아무개 씨(여·45)가 유일하다. 전 씨는 지난해 8월 내연남을 성폭행하려 한 혐의(강간미수)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전 씨가 남자친구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온몸을 묶은 채로 성관계를 시도했다고 보았다. 당시 법원은 “약효가 센 수면제(졸피뎀)를 먹고 나면 직후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기억을 못하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라며 “수면제를 먹고 의식을 잃었다는 남자친구가 유독 강간당할 뻔한 상황만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건 의심스럽다.
결국 전 씨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 씨의 내연남에 대한 폭행·협박 행위가 인정되지 않아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번 사건은 전 씨의 경우와 다르지만 심 씨의 강간죄 성립 여부엔 법원이 A 씨의 진술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이나 법조계에선 대체로 범죄가 성립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법무법인 강의 구주와 변호사는 “감금하기 위해서는 폭행, 협박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며 “그 상황을 이용해 간음했다면 감금의 수단이 되었던 폭행, 협박이 강간에도 이용됐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구 변호사는 “외부자극에 신체가 반응하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발생하기도 한다. 법원의 판단이 남았지만 테이프로 손과 발이 묶였다면 항거불능 상태도 인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 되었지만 논란은 여전하다. 성관계가 가능하려면 A 씨가 성적인 흥분 상태에 있어야 하기 때문. 일각에서는 “감금과 같은 공포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다”부터 “그래도 여자가 어떤(?) 행위를 하면 성적흥분을 느낄 수 있다” 등 주장이 엇갈리는 중이다. 이윤수 성의학연구소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무래도 감금상황에선 발기가 힘들다. 이 사건은 의문의 여지를 많이 남긴다”며 “‘끈으로 묶인 채로 당했다’는 남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심리적 압박 상황에서 발기가 가능한 경우는 드물다”고 밝혔다. “남자가 사디즘(성적가학증)이나 마조히즘(성적피학증)같은 취향이 있지 않은 이상 성적 흥분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몇 시간씩 묶여서 강요를 당했다면 정상적인 성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게 이 소장의 의견이다. 일부에선 그들이 부부 사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성관계를 할 때는 일시적으로 긴장감이 이완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범죄심리학자는 A 씨 진술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A 씨가 검찰조사에서 “감금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어쩔 수 없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한 점을 주목했다. 이수정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일반적으로 성폭행 사건은 직접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양 당사자들의 진술이 엇갈린다. 따라서 ‘사실관계’가 쟁점이 된다”며 “여자가 남자를 강간하는 상황은 외국에서도 거의 없다. 또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는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리적 반응이다”고 설명했다. 이수정 교수는 “이번 사건은 좀 이상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성관계가 가능할까 싶다”고 되물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