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아시아선수권, 김응용의 홈런으로 숙원 달성
역사는 1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대 한일전 8회 드라마의 첫 주인공은 바로 김응용 전 한화 감독이었다. 그해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국은 해방 이후 일본에 7전 전패를 당한 터였다. 콜드게임으로 끝난 경기도 여럿이었다. 우리보다 야구 역사가 훨씬 오래된 일본은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겨졌다. 그러나 대회 첫 대결에서 일본에 5-2로 승리하면서 광복 18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야구를 제압했고, 역사적인 1963년 9월 29일 개최된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고 우승하는 역사를 남겼다.
당시 만 22세였던 김응용은 1회 중견수 희생플라이로 선취점을 뽑은 뒤 1-0 살얼음판 리드를 이어가던 8회 무사 1루서 기어이 일을 냈다. 동대문야구장을 반으로 가르는 큼직한 쐐기 중월 2점홈런(비거리 120m)을 터트린 것이다. 곳곳에 ‘타도 일본’이라는 벽지가 붙어 있던 동대문구장은 그 순간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한국의 3-0 승리. 한 일간지는 ‘60년 구사(球史)의 숙원 달성’이라는 제목을 붙인 기사를 실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일제시대 설움을 겪었던 국민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내려와 선수들을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1982년 세계선수권, 전국을 들끓게 한 한대화의 3점포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8회 김재박이 ‘개구리 번트’로 동점을 만들었고 이어서 한대화가 3점포를 터뜨리며 5-2 역전승을 거뒀다. MBC 방송 화면 캡처.
당시 이 경기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잠실구장에는 수용인원 3만 명을 훌쩍 넘는 인파가 몰렸고, 중계방송을 보기 위한 야구팬들의 행렬로 TV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경기 기념우표는 발행 당일 300만 장이 모두 매진됐다. 한대화는 서울 한복판에서 카퍼레이드를 펼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하나가 된 채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 2000년 시드니올림픽, ‘8회의 사나이’ 이승엽의 탄생
한국 야구가 사상 첫 올림픽 메달에 도전하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 한국의 3·4위전 상대는 얄궂게도 일본이었다. 동메달을 목에 거느냐, 혹은 빈손으로 돌아가느냐가 걸린 운명의 일전. 다행히 한국은 예선전에서 일본에 1승을 먼저 거두면서 일본 야구에 대한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였다. 이승엽이 1회부터 일본의 자존심이자 ‘괴물’로 통하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점 홈런을 날렸고, 연장 10회 접전 끝에 7-6으로 1점 차 승리를 따낸 것이다.
‘일본킬러’ 구대성(왼쪽)과 김광현.
설욕을 벼르던 일본은 또 다시 마쓰자카를 3·4위전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다행히 한국 마운드에는 ‘일본 킬러’ 구대성이 버텼다. 7회까지 점수를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면서 마쓰자카와 팽팽한 ‘0’의 맞대결을 펼쳐 나갔다. 평행선처럼 팽팽하던 그 균형은 역시 8회에 깨졌다. 2사 2·3루서 ‘국민타자’ 이승엽이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적시 2루타를 날리면서 다시 마쓰자카를 무너뜨렸다. 이어 김동주의 우전 적시타까지 터져 한국은 확실하게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구대성은 9이닝 5피안타 11탈삼진 1실점으로 완투승까지 따냈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응용 감독은 대회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동메달을 딴 것보다 일본을 이겼다는 것이 더 기쁘다.”
# 2006년 WBC, 이승엽의 홈런과 이종범의 포효
그 후로도 오랫동안, ‘국민타자’라는 호칭은 늘 단 한 명에게만 쓸 수 있었다. 바로 이승엽이다. 그 이유를 제대로 입증해주는 장면이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다시 나왔다. 이승엽은 일본과의 1라운드 첫 대결에서 1-2로 뒤진 8회 1사 1루서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우월 역전 결승 2점홈런을 쏘아 올렸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모인 대회, 그것도 일본 야구의 심장으로 통하는 도쿄돔에서 일본의 자존심을 제대로 꺾었다.
일본과의 2라운드 재대결에서는 대표팀 주장 이종범이 주인공이었다. 0-0으로 팽팽하게 맞선 8회 1사 2·3루서 일본 최고의 소방수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결승 2타점 2루타를 작렬했다. 타구가 외야 좌중간 한복판에 떨어지자, 이종범은 양팔을 벌리고 포효했다. WBC의 ‘4강신화’를 이끄는 한 방이었다. 3루서 아웃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이종범을 향해 승리를 예감한 한국 선수단이 달려들었다. 물론 8회에 만들어진 두 번의 기적 뒤에는 ‘국민 우익수’ 이진영의 호수비가 존재했다. 이진영은 0-2로 뒤진 1라운드 일본전 4회 2사 만루서 니시오카 쓰요시의 싹쓸이 2루타성 타구를 ‘슈퍼 다이빙캐치’로 낚아채 흐름을 바꿔놓았다. 0-0이던 2라운드 일본전 2회 2사 2루서는 사토자키 도모야의 우전안타 타구를 잡자마자 정확한 원바운드 송구로 2루주자를 홈에서 잡았다. 당시 일본 대표팀의 오 사다하루 감독이 “한국의 우익수 때문에 두 번 졌다”고 통탄한 이유다.
# 2008년 베이징올림픽, 그리고 이승엽이 있었다
2008년 한국 야구는 베이징에서 역대 가장 완벽했던 ‘전승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환희의 제물 역시 일본이었다. 한국은 이번에도 일본과의 예선 경기에서 먼저 이겼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한국 대 일본 준결승전에서 8회말 이승엽이 역전 투런 홈런을 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정부터 극적이었다. ‘일본 킬러’ 김광현이 5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았지만, 6회 1사 2루서 등판한 윤석민이 2점 홈런을 내주면서 리드를 뺏겼다. 다행히 한국도 7회 이대호의 동점 2점 아치로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 이어 한국이 9회 김동주의 안타로 무사 1루 기회를 잡자 김경문 감독은 중심 타자 이대호에게 허를 찌르는 희생번트를 지시했다. 그리고 2사 1·2루서 다시 좌완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좌타자 김현수를 대타로 기용했다. 결국 김현수가 절묘한 역전 적시타를 쳤고, 이어진 2사 2·3루에서 이종욱의 번트 안타와 일본 포수 아베의 2루 송구 실책이 나오면서 승리를 굳혔다.
문제는 그 다음. 예선에서 이겼어도, 준결승을 이겨야 진짜 승리다. 결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다시 만난 일본. 한 번 이겼기에 오히려 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그러나 한국에는 숨죽이고 있던 홈런왕 이승엽이 있었다. 이승엽은 이전까지 예선 7경기에서 22타수 3안타로 부진했다. 숱한 득점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뚝심으로 4번타자 이승엽을 밀어붙였다. “정말 중요할 때 딱 한 번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엽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일본 선발은 좌완 스기우치 도시야, 한국 선발은 좌완 김광현. 승부는 시종일관 팽팽했다. 1-2로 뒤진 7회 1사 후, 이대호가 볼넷을 골라 걸어 나가자 김 감독은 과감하게 대주자 정근우로 교체했고, 고영민의 적시타와 대타 이진영의 우전 적시타로 기어코 동점을 만들었다.
그렇게 운명의 8회가 찾아왔다. 선두타자 이용규가 안타로 출루했다. 곧바로 김현수가 삼진을 당해 1사 1루. 다음 타자는 앞선 세 타석에서 삼진·병살타·삼진으로 물러난 이승엽이었다. 김 감독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타석에 선 이승엽은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키의 직구를 퍼 올렸다. 타구는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더니 오른쪽 담장을 넘었다. 이승엽이 다시 한 번 ‘8회의 기적’을 아로새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여세를 몰아 2점을 더 보탰다.
8이닝 2실점(1자책점) 역투를 펼친 김광현이 9회 마운드를 윤석민에게 넘겼다. 윤석민은 기다렸다는 듯 세 타자를 깔끔하게 틀어막았다. 감격의 올림픽 결승 진출. 마지막 아웃 타구를 잡아낸 우익수 이용규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엎드렸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이승엽은 인터뷰 도중 모든 응어리를 털어내듯 끝내 눈물을 훔쳤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2009년 WBC 추억 한일전만 다섯차례…이치로 “헤어진 여친 다시 만나는 느낌” 한국은 이미 2006년 1회 대회에서도 두 차례나 일본을 먼저 꺾었지만 세 번째로 맞붙었던 4강전에서 지는 바람에 귀국 보따리를 쌌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2회 대회에서는 맞대결이 오히려 더 많아졌다. KBO가 WBC 사무국에 대회 방식 재고를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어쩔 수 없다. 흥행을 위해서는 두 나라가 감수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1회 대회 때 한일전이 최고의 흥행카드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조직 위원회가 2회 대회 때도 흥행을 위해 한일전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결과도 롤러코스터 같았다. 1라운드 첫 경기에서는 ‘일본 킬러’ 김광현이 선발로 나섰다가 일본의 현미경 분석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일본 타자들이 1회부터 김광현의 주무기인 슬라이더를 마음껏 노려 친 끝에 한국은 2-14로 7회 콜드게임 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0-3으로 뒤진 1회말 4번 타자 김태균이 일본 선발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초대형 2점 홈런을 뽑아낸 것이 위안이었다. 그러나 1라운드 결승전에서는 한국 선발 봉중근이 일본 리드오프 스즈키 이치로와의 기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하면서 한국이 1-0으로 이겼다. 봉중근에 이어 정현욱·류현진·임창용으로 이어지는 특급 계투가 일본 타선을 봉쇄했고, 새로운 해결사 김태균이 천금 같은 결승 적시타를 때려냈다. 임창용이 일본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순간, 백전노장 김인식 감독조차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A조 1위와 2위로 2라운드에 진출한 한국과 일본은 8강전에서 다시 만났다. 일본의 간판 이치로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라는 말로 계속된 한일전에 대한 부담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도 또 한 번 봉중근의 역투를 앞세워 승기를 잡아나갔다. 윤석민과 김광현이 필승 계투조로 뒤를 받쳤다. 4-1로 승리해 4강 진출을 확정지은 한국은 1회대회 4강 확정 순간과 똑같이 펫코파크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어진 네 번째 맞대결은 사실상 ‘버리는 경기’였다. 2라운드 결승이었지만, 이미 두 팀 다 4강이 확정된 상황이라 승패에 큰 의미가 없었다. 한국은 2-6 패배를 떠안은 대신, 마운드와 타선의 핵심전력을 아끼고 백업 멤버들을 경기에 내보냈다. 그 덕분에 베네수엘라와 준결승에 총력을 기울여 10-2 대승을 낚아챘다. 그리고 찾아온 일본과의 마지막 다섯 번째 만남. 외나무다리와도 같은 결승전이었다. 경기 전 한국 대표팀 김인식 감독은 ‘위대한 도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고 다짐했고, 일본 대표팀 하라 다쓰노리 감독 역시 ‘세기의 경기’라고 단언하면서 “100년에 한 번 있을 만한 경기를 하겠다”고 각오를 보였다. 실제로 경기는 팽팽하고 극적이었다. 1-2로 뒤진 한국은 9회말 1사 후 볼넷 2개를 얻어내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다음 타자 추신수는 삼진. 그러나 이어진 2사 1·2루서 이범호가 일본 최고의 투수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동점 적시타를 터뜨렸다. 2루주자 이종욱이 슬라이딩으로 홈을 밟는 순간,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거렸다. 결국 연장 승부 끝에 패하면서 우승이 좌절됐지만, 선수들은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은 한국 야구의 뒷심을 보여줬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