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말했다. 엄마가 자기 재산을 누구에게 주든지 그건 엄마 마음이라고. 왜 멀쩡한 엄마를 치매 환자 취급하느냐고. 대신 엄마가 집을 날려도 그걸 복원해줄 의무는 없는 거라고. 다만 집도 절도 없어질 엄마를 돕고 싶으면 그대 이름으로 집을 얻어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현대인들이 스님의 즉문즉설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거기엔 세상의 많은 고통들이 여과 없이 던져졌고, 그 고통들을 대처하는 방법들이 직설적으로 전달되었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야단법석은 불교의 전통적인 법회 방식이다. 법상을 마당에 내려놓은 자리, 누구나 올 수 있는 시끌시끌한 자리였다. 그 난장에서 오히려 구체적인 자기 고통을 응시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해 스님은 100곳이 넘는 세계의 도시들을 돌며 그야말로 지구촌 야단법석을 펼쳤다. 때로는 교회였고, 때로는 성당이었고, 때로는 학교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채록해서 <야단법석>이라는 책을 내고 북 콘서트를 열었는데, 조계사에서 열린 북 콘서트에서 내가 사회를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 시대에 ‘법륜’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15개 도시에서 스님이 만난 사람들은 다양했다. 도시도 다양하고 사람도 다양하고 교육의 정도도, 종교도 다양했다. 상황도 다양했다. 그런데 그들이 토해내는 고통은 어쩌면 그렇게 익숙한지. 이기적인 룸메이트, 참고 살기 힘들다, 계속해서 아빠를 흉보는 엄마 전화를 받기 싫다, 밖에서 착한 척하느라 집에서 화풀이하고 있다, 종교가 달라 가족이 갈등한다, 나만 가족을 챙기는 것 같아 억울하다 등등.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결혼을 했거나 혼자 살거나, 교회를 다니거나 성당을 다니거나 절에 다니거나, 유럽에 살거나 미국에 살거나 일본에 살거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고해(苦海)를 헤엄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고해는 무엇보다도 사랑받고 싶은 욕망, 존중받고 싶은 욕망에서 연유한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말했다. 사랑받으려 하면 100% 실패한다고. 사랑받으려는 욕심이 기대를 만들고, 기대에 대한 실망이 불행을 만드니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그냥 사랑하라는 거였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보면 그냥 좋은 거예요. 설악산 가면 좋죠? 설악산한테는 내가 널 좋아하니까 너도 날 좋아해라, 이런 생각이 없잖아요. 그래서 설악산을 좋아하는 데는 부작용이 없는 거예요.”
사랑한다면, 설악산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행복을 만드는 기술이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