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이 강기훈 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8월, 경남 통영의 한 병원 앞이었다. 당시 사법부는 2007년 진실화해위의 재심 권고 이후 이를 받아들였지만, 몇 년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강 씨는 간암 판정까지 받아 지방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요양 중이었다.
3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2012년 재개된 재판은 고법의 무죄판결을 거쳐, 드디어 올해 5월 대법원 무죄확정판결로 일단락됐다. 그리고 지난 11월 9일, 누차 인터뷰를 거절한 강 씨는 못이기는 척 3년 만에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남을 허락했다. 그는 이날도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지난 2012년 8월, 암 발병 직후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있는 강기훈 씨의 모습. 3년 만에 다시 만난 강 씨는 당시에 비해 얼굴이 상당히 좋아진 상태였다. 일요신문DB
“그런가. 그 때는 막 발암 직후였다. 전혀 먹지도 못하고, 비타민 치료를 받고 있었다. 지방에 내려갔던 것도 서울에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였다. 기자께서 나와 가장 안 좋았을 때 만난 거다. 요즘에는 아예 내 건강 문제도, 재판과 관련한 문제도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세세하게 알면 머리만 아프니 말이다. 수술도 한 번 했는데, 그렇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집사람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요즘엔 ‘어떻게 하면 잘 놀까’ 생각만 한다. 일도 안 하고 쉬고 있다.”
―지난 5월, 24년 만에 무죄확정판결을 받았는데.
“달라진 것 없다. 예상대로다.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기분이 좋지도 않다. 판결문 내용도 잘 보지 않았지만, 달랑 두 장이다. 내용이라고 할 것도 없다. 정말 무성의했다. 읽다가 말았다.”
―일단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나보단 나를 도와준 변호인단 의지가 컸다. 그동안의 일도 사실 변호인단을 비롯한 주변의 도움이 없었으면 정말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번 소송도 그 분들이 계속 하시는 거다. 그나마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다.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미안하다’ 안 한다. 이를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은 아무도 안 한다. 사실 ‘이걸 또 소송해야 하나’하는 맘도 있다.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않나.”
―그래도 5월 무죄확정판결 당시, 여야 의원들이 응원해줬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물론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도 공개 환영 의사를 밝혔는데.
“현재 그 분들의 정치 행태가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옛날의 인연을 잊지 않아줘서 고맙다. 심상정 선배는 전노협 당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 하늘같은 선배다. 태경이 역시 같이 구속되고 투옥했던 동료였다.”
―당시 조작에 가담하고 그릇된 판결을 내린 당사자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용서가 어렵다. 위대한 성인도 못할 것이다.”
―사적인 사과조차 없었나?
“아무도 한 적 없다. 인간은 원래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한다. 설령 잘못한 일이라도 자기 보호 기제가 작동한다. 그것을 객관화하는 사람은 지혜롭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 자들은 시류에 영합해 온 사람들이다. 모두가 ‘당연하다’ 여길 것이다. 운명공동체처럼. 화해? 내가 그런 에너지를 왜 쓰나. 그 사람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도 스트레스다.”
―유서대필조작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면이 됐다. 어떻게 보면, 본인이 평생 짊어져야 하는 ‘운명’ 아닌가.
“지금까지 짊어졌는데 뭘 또. 이젠 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나와 당시 사건에서 비롯된 일련의 일들은 더 이상 관계없다. 물론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의미 있다. 누군가 그러더라. (현재 논란 중인 국정 교과서와 관련해) ‘다른 것 말고, 이런 일을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유서대필조작사건과 관련해서 1993년에 만들어진 2700쪽 분량의 ‘총자료집’이 있다 이 자료가 없었으면, 현재의 결과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해당 사건은 이 기록을 통해 객관화돼 있다. 이를 토대로 나오는 문학, 영상물, 기사 등에 내가 참견하는 것은 월권이다. 난 이와 관련해 출판된 서적이나 기사와 관련해 논평요청이 와도 한 번도 들춰본 적 없다.”
기록에 대해 강조하던 강 씨는 넌지시 현재 자신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현재 당시 사건 이후 나와 관련한 다큐멘터리가 제작 중이다. 벌써 2년 넘게 카메라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내 얼굴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연한 것이다. 아마도 내년 3월쯤 촬영이 마무리되고 공개될 수 있을 듯하다.”
―향후 계획은.
“내가 회사생활을 17년 했다. (강 씨는 투병생활 이전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기획과 영업을 담당했다) 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다이어리를 펼쳐보니, 계획대로 된 일이 단 하나도 없더라. 뭔가 싶었다. 앞으론 계획을 세우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 물론 그런 맘은 있다. 나의 일로 인해 세상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은 맞다. 그런데 어째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강기훈 씨는 3년 전과 비교해 비슷하면서도 달라졌다. 세상에 대한 그 특유의 냉소는 여전했지만, 중간 중간 오가는 사람들과 재미없는 농담도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그 전에는 없었던 ‘세상에 대한 희망’이 보였다. 아주 어렴풋하지만. 더군다나 강 씨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여전히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지속하고 있으며, 내년 개봉을 앞둔 다큐멘터리 작품에 출연중이다. 아직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셈이다.
강 씨는 <일요신문>과의 만남을 허락한 자리에서도 특유의 냉소를 담아 “이건 인터뷰가 아니라, 그저 ‘만남’”이라고 한정했다. 하지만 그 스스로 ‘기록’에 대한 의미를 강조했다. 기자는 ‘객관화된 사건에 본인의 근황 역시 응당 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겨우겨우 강 씨로부터 절반의 허락을 받아 이를 보도한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이란 ‘한국판 드레퓌스’ 24년 만에 누명 벗어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은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항의해 벌어진 잇따른 분신 사건에서 비롯됐다. 1991년 5월 8일 당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의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검찰은 그의 친구였던 강기훈에게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그렇게 강기훈은 누명을 쓰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아 1994년까지 만기 수감된다. 2007년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사법부에 진실규명을 권고했다. 이를 받아들인 사법부는 2012년 재심을 재개, 2014년 서울고법에서 강 씨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검찰은 이에 불복, 결국 대법원은 지난 2015년 5월 14일 강 씨에 무죄확정판결을 내렸다. 강 씨는 현재 변호인단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황이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