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증권 매각 무산으로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책임론도 나오고 있다. 사진은 현대증권 건물.
“몸통만은 살려야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팔·다리를 잘라냈는데 이제 와서 처방하고 집도한 의사가 목숨이 위태롭다며 몸통마저 대부분 잘라내야겠다고 한다. 구조조정 모범 사례로 치켜세웠던 현대그룹을 산업은행은 하루아침에 부실기업으로 전락시켰다(재계 관계자).”
“우리는 현대그룹을 구조조정 모범기업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현대그룹은 기본적으로 ‘회사채신속인수제’ 혜택으로 연명해온 기업이다. 처음부터 ‘모범’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기업이다. 지금으로서는 업황 개선이 어려운 현대상선을 현대그룹이 계속 갖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산업은행 관계자).”
돌연 궁지에 몰린 현대그룹을 보는 시선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현대그룹은 그룹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상선 매각 가능성까지 흘러나올 정도로 위태롭다. 현대상선의 자체 유동성 확보와 정부의 회사채 상환 유예로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 더 큰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분석이 강하다.
최근 상황에 대해 현대그룹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도 “현대상선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것이 많다”고 말했다. 현대상선 매각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지난 10월 말 현대증권 매각이 무산되면서 위기에 휩싸인 현대그룹의 모습은 과거 거친 구조조정 과정을 밟은 동양그룹·동부그룹·STX그룹·한진해운 등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동양과 STX는 턱없이 부족한 유동성을 계열사 간 돌려막기 등에 기대며 버텼지만 결국 그룹이 해체됐다.
계열사 매각 과정에서 여러 차례 진통을 겪은 동부그룹은 현재 사실상 금융계열사만 남아 있는 상태다.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이 이끌었던 한진해운은 글로벌 경기 침체와 장기 불황으로 고생하다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넘어갔다. 이들 그룹의 전철을 밟아 나가고 있는 현대그룹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한 시점이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이들 그룹과 다른 점이 있다. 2013년 동양그룹이 해체된 이후 정부와 금융당국은 국민경제에 큰 타격이 되는 대기업 부실을 막겠다며 각 채권단과 대기업에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이에 포함된 대표적인 대기업이 동부그룹·현대그룹·한진해운인데, 현대그룹은 가장 발 빠르게 움직였다. 3조 3000억 원에 달하는 구조조정 자구계획안을 발표한 현대그룹은 지금까지 이를 대부분 이행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같은 이유로 현대그룹은 ‘구조조정 모범기업’으로 거론됐다. 동부·한진그룹을 비롯해 구조조정이 시급한 대기업들에 현대그룹의 사례를 강조하기도 했다. 금융당국과 채권단도 회사채신속인수제(기업이 만기 도래한 대규모 회사채를 상환하기 위해 또 다른 회사채를 발행하면 이를 산업은행이 인수해주는 제도)로 현대그룹에 화답했다.
하지만 마지막 퍼즐로 인식됐던 현대증권 매각이 무산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과정이 한순간에 평가절하됐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현대증권 매각 무산 하나로 그동안 말을 잘 듣던 현대그룹을 채권단이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고 있다”며 “하물며 말을 잘 듣지 않았던 다른 그룹들에는 오죽했겠느냐”고 비난했다.
공교롭게도 선제적 구조조정이 절실한 기업으로 분류됐던 동부그룹·현대그룹·한진해운의 구조조정은 산업은행의 주도 아래 이뤄진 것으로 비치고 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구조조정을 주도한 기업 치고 지금 제대로 된 기업이 있느냐”면서 “금호그룹·대우조선 등에 실시한 지원을 감안하면 산업은행의 공정성·합리성이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산업은행은 무리한 인수로 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에 우선매수청구권을 주면서 경영권을 보장했고 대규모 부실을 감추다 들통 난 대우조선에는 4조 원대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다른 기업들에도 오너의 결정을 전제로 한 자금 지원과 경영권 보장을 약속했다”며 “하지만 오너들은 손해를 보거나 사재를 출연해 책임을 함께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전부 지키려는 욕심만 부렸다. 이중에는 국민경제와 상관없이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기업도 있다”고 반박했다.
재계 일부에서는 현대그룹에 대한 산업은행의 반응이 갑작스레 돌변한 까닭을 ‘조바심’에서 찾는다. 대우조선 부실 사태 책임에다 대우증권 등 자회사 매각 현안 등이 겹치면서 산업은행의 갈 길이 바빠졌다는 것. 특히 결산과 실적 부담이 커지는 연말이 다가오면서 산업은행이 더 급해졌다는 분석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대증권 매각 재추진에 소홀히 하는 이유도 대우증권 등 자회사 매각을 더 급히 처리하려는 욕심에 기인한다”며 “현대증권 매각을 마무리 지은 후 대우증권 매각에 나설 것이라던 당초 계획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