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준 | ||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정치적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예민하게 반응하며 입조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많은 축구인들과 정가는 축구협회가 정몽준 회장의 대선 출마에 어떤 식으로든 간여할 것이라는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축구협회의 요직 상당수를 현대중공업 등에서 파견된 ‘현대맨’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 서울시 종로 신문로 2가에 위치한 축구회관 6층의, 월드컵 전에 신설된 홍보국도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협회에 파견 나가 있는 ‘현대맨’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거 준비 체제에 돌입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반면 소외된 기존의 축구협회 직원들은 표현 못할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주도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른바 ‘현대맨’들과 공생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 것.
‘오리지널’ 축구협회 직원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현대맨들이 떠난 이후에도 축구협회가 자생적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여부다. 과연 축구협회는 이번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
현대맨들의 축구협회 요직 장악 실상을 통해 축구협회의 향후 활동을 점쳐 본다. 축구협회의 기구 조직도를 살펴보면 회장 밑에 6명의 부회장과 전무이사 사무총장, 그리고 경기국, 국제국, 홍보국 국장이 자리한다. 자주 자리를 비우는 정 의원을 대신해서 축구협회 회장직을 대행하는 김상진 부회장은 축구인들 사이에서 ‘포스트 정몽준’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93년 정 의원과 함께 축구협회에 몸담은 후 2002월드컵 한국조직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 의원의 신망이 두텁다.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일보 정치부장과 문공부 해외공보관, KBS 방송사업단 상무를 역임하는 등 매스컴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한때 정 의원과 언론사와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중연 전무는 ‘현대맨’들로 주축이 된 정 의원 참모진 중에서 유일한(?) 축구인 출신이다. 고려대 출신으로 프로축구 현대 감독과 KBS 해설위원을 지내다 김정남 전무(현 울산 현대 감독)의 후임으로 협회에 발을 내딛었다.
축구인들은 처음 조 전무를 통해 축구인들의 목소리가 정 의원에게 전달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가끔 정 의원의 입장에서 축구인들을 대하는 바람에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조직표상으론 조 전무가 정 의원의 2인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인 2인자는 현대중공업에서 총무부장을 지낸 남광우 사무총장이다. 협회의 모든 자금 관리와 인사 업무를 총괄하며 협회 예산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실세 중의 실세.
원래 남 총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프로축구연맹의 김원동 국장이 당시 부장으로 일을 했다. 그러나 재무부장으로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프로연맹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자리에 남 총장이 사무국장으로 부임했다가 지난 1월 사무총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 축구협회관 | ||
실제로 남 총장은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된 박항서 감독의 임기에 대해 아시안게임 이후 감독을 교체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태가 계속해서 확대되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렀다는 후문이다.
협회는 크게 경기국, 국제국, 홍보국 등 3개의 사업국으로 나뉜다. 이들 중 경기국의 서동필 국장은 국장이면서도 유일하게 참모회의에 참가하지 못하는 홀대를 받고 있다. 경기국은 업무 특성상 16명의 직원 모두가 기존 축구협회 직원들로 이뤄졌다.
참모회의가 주로 협회 행사와 정 의원과 관련된 일들이 논의되는 자리라 서 국장의 참석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견해. 그러나 경기국장만 따돌리고 진행되는 참모회의는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 국제국은 축구협회의 ‘노른자’들로만 이뤄진 ‘알짜’ 집단이다.
그래서인지 15명의 직원 중 2명의 여직원을 포함한 8명을 빼놓고는 모두 현대 출신들로 파견 나온 임시 직원들이다. 임시 직원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축구협회 직원치고 국제국 직원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가삼현 국제국장은 현대중공업 해외영업 차장을 거친 뒤 93년 축구협회에 입사, 지금까지 국제부에서 일해 왔다. 월드컵 때는 한국조직위원회 경기운영본부장으로 임명돼 축구협회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했다. 가 국장의 진가는 히딩크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여우’ 같은 히딩크를 상대해서 남다른 입담을 과시한 가 국장은 히딩크 영입 후 정 의원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가 국장은 해외 축구 업무와 정 의원의 FIFA 부회장 업무를 담당하지만 협회 내에서도 기존 축구인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몇 안되는 ‘현대맨’ 중 한 사람이다.
즉 축구인들과 친분이 두터운 편인데 국제국에서 가 국장의 위상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 국장 바로 밑에는 역시 현대중공업 출신의 고승환 부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 국장과 함께 히딩크 영입을 위해 뛰었던 사람으로 가 국장이 월드컵 전후로 조직위원회에 파견나가 있을 때 고 부장이 국제국 국장 역할을 대신했다. 올해 처음 협회와 인연을 맺은 장규성 차장은 현대에서 일하다 정 의원의 AFC(아시아축구연맹) 초청 인사들 수행시 의전 담당을 맡은 게 인연이 돼 축구협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특별한 일이 없자 다시 본사로 U턴할 위기에 처했다가 남 총장의 지시에 의해 홍보국으로 발령 받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벨기에 현대 지사에서 일하다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98프랑스월드컵 당시 정 의원을 보좌했던 정재훈 차장(국제국)은 정 의원의 막강한 신임으로 인해 남 총장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한다는 게 주변인들의 시각이다.
역대 대통령 보좌관 출신의 아들인 정 차장은 화려한 배경에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 그리고 정 의원의 의중을 꿰뚫는 능력 등으로 신임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영우 과장도 현대 출신으로 A매치 경기를 위해 방한하는 외국팀을 전담하고 있으며 역시 현대중공업에 적을 둔 김응수 과장은 정 의원이 해외 축구연맹에 보내는 편지를 대신 작성하는 일을 주로 담당한다.
히딩크 감독의 통역을 전담했던 전한진 과장도 현대중공업 출신으로 능통한 영어 실력 때문에 히딩크 감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케이스. 장규성 차장과 함께 AFC 행사를 돕기 위해 ‘울산’에서 올라온 유동봉 대리는 국제초청대회를 전담하며 대회 행사 전반을 도맡아 처리한다.
이렇듯 국제국이 막강 ‘현대맨’들로 구성됐다면 홍보국과 지원부에도 틈틈이 ‘현대맨’들이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김형룡 차장, 남 총장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는 지원부의 김정만 부장, 협회 자금 담당을 맡고 있는 ‘홍길동’ 지윤락 차장, 기획실의 이상락 차장 등이 협회의 중요 직책을 고루 맡았다.
▲ 조중연 축구협회 전무 | ||
축구인 B씨는 “한마디로 재벌사의 횡포나 마찬가지다. 파견수당을 포함하면 협회 직원의 월급을 크게 상회한다. 어차피 파견 나오든, 직장에서 근무하든 일하는 것은 똑같지 않나. 현대에서 파견 나온 직원치고 다시 본사로 돌아간 경우가 거의 없다. 그만큼 협회 근무 메리트가 있다는 증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때 기존의 협회 직원들 사이에서 이런 부조리한 제도 자체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쏟으며 반발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했으나 워낙 벽이 두터워 시도도 못한 채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 축구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대통령 선거 전후 정 의원의 행보다. 정 의원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스포츠와 정치를 별개로 분리한다면 대선 출마와 함께 협회장직도 그만두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
그러나 현재 정 의원 입장에선 협회장 자리를 내놓을 계획이 없는 듯하다. 축구계 일각에서는 정 의원이 축구협회를 선거운동에 활용하고, 또 이번 대선에 실패할 경우에 차기를 계속 노리기 위해 이런 행보를 보이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히딩크 감독을 2006년 월드컵대표팀 사령탑에 앉히겠다는 복안이다. 즉 4년 후 열리는 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한국의 신화 창조를 이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의 입지를 재확인하는 한편 국민들에게 친근하고 자신감 넘치는 대통령 후보의 이미지를 재창출하겠다는 계산이 아니냐는 시나리오다.
축구인 C씨는 “정 회장이 대선에 뜻을 두고 축구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면 축구협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아줘야 한다. 그 기대 하나로 지금까지 기다려왔다”며 축구발전기금이 확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맨’들에 의해 서자 취급을 받았던 ‘오리지널’ 축구협회 직원들은 정 의원의 대선행보와 차기 협회장이 누가 되든 큰 관심이 없다. 오로지 축구협회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제 갈 길만을 가기 바랄 뿐이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