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갑작스런 터키 진출과 그에 이은 좌절. 황선홍 은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차라리 잘됐 다. 그러나 이젠 사람을 못 믿겠다”고 털어놨다. | ||
뭔가 어깨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벗은 뒤의 홀가분함처럼 미련도 아쉬움도 전혀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가시와 레이솔에서 방출 당한 뒤 보름여간 ‘백수’로 지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향한 터키. 오로지 축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갈망으로 ‘선생님’처럼 믿고 따른 에이전트를 떠나 다른 에이전트와 손을 잡으면서 무거운 마음이 되었던 황선홍은 비록 스타일은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큰 경험을 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정신 없이 진행된 황선홍의 터키 진출 과정과 협상이 결렬된 진짜 이유 등 막후 스토리를 단독으로 공개한다.
황선홍(34)이 터키 트라브존 스포르 입단을 결정하기까지는 이틀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적료가 없는 무적 선수라 협상 과정이 일사천리로 성사됐지만 선수 자신은 날밤을 새울 만큼 깊은 번민과 두려움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황선홍은 터키로 출발하기 전날인 지난달 28일,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냈었다. “내일 터키로 떠난다. 12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 판단이 옳은 것인지.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는데 솔직히 두렵다.”
황선홍이 터키행을 선택하기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에이전트 이영중씨(이반스포츠 대표)와의 관계.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다른 에이전트와 입단 문제를 추진한다는 사실 자체가 계속해서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황선홍은 그렇게 오만가지의 번민들로 불면의 밤을 보낸 뒤 29일 오전 8시 비행기로 터키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30일 트라브존 부구단주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황선홍은 ‘혹시나’ 싶었던 우려가 조금씩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황선홍을 보자마자 부구단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 키와 몸무게를 묻는 내용이었다.
황선홍으로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수를 영입하려는 구단이 어떻게 기본적인 신체조건도 모르고 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출발부터 심기가 뒤틀린 황선홍으로선 계속되는 조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약 기간도 에이전트의 말과는 달랐다. 황선홍은 미국행을 염두에 두고 6개월 계약을 원했고 에이전트도 그 부분에 대해선 구단의 양해를 얻었다고 했는데 트라브존 부구단주는 1년 계약 아니면 절대 안된다고 강경한 태도로 버텼다.
50만달러라고 자신했던 연봉은 허황된 꿈에 불과했다. 황선홍의 측근에 의하면 처음 제시한 연봉이 15만달러였다고 한다. 황선홍이 단호하게 ‘노우’라고 말하자 그 다음 부른 액수가 30만달러였는데 황선홍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부구단주가 50만달러를 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뒤로 들으며 그 사무실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에이전트의 말만 믿고 간 게 잘못이었다. 가서 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기대반 걱정반으로 터키로 향했다. 내가 갈 곳이 아니었던 것 같다.” 황선홍은 일본에서 터키로 출발하기 전 아내 정지원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을 했다.
“내 발이 너무 무겁다”고. 그래서인지 황선홍은 물론 아내와 아이들도 협상이 결렬된 것을 너무 기뻐하는 이상(?)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황선홍의 터키행을 추진했던 에이전트 최호규씨(하나스포츠 대표)는 터키로 출국 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황선홍의 계약이 틀림없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황선홍 이전에 안정환, 유상철과도 접촉했음을 털어놓았다. 최씨는 무적 위기에 놓인 안정환이야말로 터키 프로리그에 돌풍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라고 보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안정환의 주변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날아가 페루지아 구단주와 직접 면담을 했다고 한다.
협상 끝에 당초 페루지아가 원했던 이적료 3백10만달러에서 2백만달러로까지 몸값을 내린 뒤 귀국 후 부산아이콘스측에 터키 트라브존 스포르에서 안정환을 영입하려고 한다며 이적료 2백만달러에 연봉 50만달러가 조건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미 페루지아와 얘기가 된 상태이니 부산 구단에서도 1백60만달러에서 한발 양보해 1백만 달러만 받는 게 어떠냐고 의향을 물었다. 즉 터키로부터 받은 2백만달러의 이적료를 페루지아와 부산이 반반씩 나눠 갖고 안정환이 뛸 수 있게끔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안정환측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블랙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최씨의 제의를 거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안정환의 영입이 무산되자 이번엔 역시 같은 처지인 유상철이 리스트에 올랐다. 그러나 유상철 또한 에이전트 이영중씨가 존재했고 공식적인 이적료 50만달러+α가 걸림돌이 되었다. 최씨는 고민 끝에 유상철 대신 황선홍을 선택했고 그 결과 국제적인 망신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이젠 사람을 못 믿겠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도 헷갈린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J리그에서 방출된 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황선홍은 9월3일경 잠시 귀국했다가 독일로 출국, 훈련에만 전념한 뒤 내년에 미국 MLS 진출을 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