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진출이 꼬이면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녔던 지 난 2년 동안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신병호. 임준선 기자 | ||
신인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일본 J리그 진출을 시도하면서부터 시작된 고행길. 브라질, 네덜란드, 중국을 거치는 동안 쓰라린 패배 의식만 잔뜩 안고 2년 만에 돌아와 안착한 K-리그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더 이상 추락할 데도 없었다. 그런 축구 인생의 한계가 신병호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최근 그의 활약을 보면 김남일, 송종국의 인기가 부럽지 않은 실력을 바탕으로 1라운드 MVP에 오르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신병호를 전남 광양 숙소에서 만나봤다. 신병호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99년 10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중국전에서부터였다. 허정무 감독이 이끈 올림픽 대표팀에서 이동국 등과 투톱으로 나섰다가 몇 차례 위기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절묘한 헤딩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매스컴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 당시만 해도 신병호한테 군침을 흘린 프로구단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행 대신 J리그 시미즈 S 펄즈로 방향을 잡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더니 연신 비행기만 갈아타는 좋지 않은 일들이 반복됐다.
▲ 전남 드래곤즈의 유니폼을 입고 다시금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신병호.[대한매일] | ||
그가 옮긴 팀만 해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 요코하마 마리노스 연습생 신분으로 있다가 브라질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프로리그에서 밑바닥 생활을 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네덜란드와 중국을 오간 기억들이 즐비하다. “지난 2년 동안은 정말 악몽이었어요. 축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한동안 세상과 절연을 선언하고 두문불출했죠. 요코하마에 있다가 브라질로 건너갈 때는 정말 서러워 엄청 울었습니다.” 신병호는 에이전트와 함께 브라질에 가면서도 정작 어느 팀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에이전트가 브라질이라는 나라만 얘기했지 팀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었고 신병호도 별로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차피 이리저리 굴러가는 인생이라면 굴러가는 데까지 그냥 내버려두자는 식의 자포자기 상태가 그 즈음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구단과 숙소를 둘러본 뒤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분명 프로팀이기는 한데 실력은 한국의 조기축구회 수준이었고 숙소에는 에어컨, 냉장고, 전화기도 없었으며 통역은 아예 꿈도 못 꾸는 형편이었다. 전남 드래곤즈의 유니폼을 입고 다시금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신병호. [대한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