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룰과 관련해 물밑에선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 간 핫라인이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연합뉴스
같은 날 밤 유승민 의원 부친(유수호 전 의원) 빈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목격됐다. 김 대표는 경북 안동 출마가 유력한 권택기 전 의원이 도중에 일어나려 하자 “지금 가면 (공천) 탈락”이라고 핀잔을 줬다. 일련의 사례들에 대해 김 대표 측은 ‘해프닝’ ‘농담’ 등이라며 서둘러 해명했지만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 대표 스탠스가 다소 유연해지고 있다는 관측이 주를 이뤘다.
그 후 김 대표는 공천룰과 관련해 그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물밑에선 김 대표와 박 대통령 간 ‘핫라인’이 활발히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계파 간 공천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8월경부터 몇몇 핵심 친박 의원들이 당·청을 오가며 중재에 나섰다고 한다. 이들은 김 대표와도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박계의 한 원로 인사는 “아직 풀어야할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협상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도 서로 마음을 열었다는 게 중요하다. 계속 싸움만 하다간 친박 비박 모두 총선에서 공멸할 것이란 위기감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귀띔했다.
양측은 일단 오픈프라이머리 추진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데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김 대표가 한 발 물러선 셈인데, 이는 당내 현실이 반영됐을 것이란 얘기가 들린다. 비박계의 한 의원은 “김 대표가 박 대통령과의 여러 차례 대결에서 연이어 패배하자 비박계 힘이 상당히 빠진 게 사실이다. 비박으로 넘어왔다 다시 친박을 자처하는 의원들도 늘어났다. 김 대표가 더 이상 박 대통령과 겨루기 힘든 상황”이라면서 “솔직히 말하면 오픈프라이머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김 대표가 출구전략을 마련해야할 때”라고 전했다.
대신 여권은 경선을 기본 골격으로 하되 전략공천, 엄밀히 말하면 우선추천제도를 적절히 활용한다는 큰 틀을 마련했다. 새누리당은 지난해 2월 당헌·당규 개정을 통해 전략공천을 삭제하고 우선추천 조항을 신설한 바 있다. 우선추천은 여성과 장애인 등 정치적 소수자의 추천이 특별히 필요하거나 여론조사 결과 등을 참작해 추천 신청자들 경쟁력이 현저히 낮다고 판단한 지역에 한해 이뤄진다. 그러나 이 역시 전략공천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전략공천보다는 범위가 줄어들긴 했지만 자의적으로 해석될 부분이 너무 많다. (전략공천과) 차이를 못 느끼겠다”라고 꼬집었다.
그동안 일정 지분을 원하며 전략공천을 밀어붙였던 청와대와 친박계로선 요구안이 일정 부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엔 김 대표와 겨룰 마땅한 차기 주자가 없다는 친박계 약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게 정치권 해석이다. 마냥 좋아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공천룰이 합의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세부적인 안들을 놓고 계파 간 이해관계가 워낙에 첨예하게 얽혀있는 이유에서다. 특히 몇 석을, 어느 지역에 전략적으로 공천을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공천=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대구·경북(TK) 지역과 서울 강남 등을 놓고 친박과 비박 간 신경전은 불가피하다. 청와대발 ‘TK 물갈이’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여진다.
계파 간 의석수 배분 역시 쉽게 풀기 어려운 문제다. ‘친박 30~40석, 비박 50석설’이 나돌고 있지만 아직 확정되진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여권 일각에선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확보하는 쪽이 지분을 덜 가져가자는 목소리도 들린다. 또 현역 의원 탈락을 의미하는 ‘컷오프’를 둘러싸고도 이해득실은 확연히 갈린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들 반응을 살펴봤다. <일요신문>과 접촉한 의원들 대부분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서도 ‘역풍’을 우려했다. 또 친박과 비박 의원 간 해석도 미묘하게 달랐다. 한 친박 의원은 “현직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가 총선 때문에 언제까지 싸울 순 없는 것 아니냐. 임기를 잘 마무리하려는 박 대통령이나 다음 대권을 준비하는 김 대표 모두에게 총선 승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룰을 가지고 오래 끌진 않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생명까지 걸었던 공약을 못 지킨 김 대표는 이미지 타격이라는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반면 김 대표 측으로 분류되는 비박 의원은 “현직 대통령과 싸워 어떻게 이기느냐. 김 대표가 만약 뜻을 접는다면 그 사정을 이해해줄 것이다. 오히려 특정 지역에 자기 사람을 심으려는 대통령을 국민들이 납득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공천룰 합의에 나선 여권 지도부 전체를 질타했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밥그릇 싸움 아니냐. 이러한 밀실합의는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