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12 대회를 앞두고 김인식 대표팀 감독이 내건 출사표였다. 고민이 묻어난 말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해외 원정 도박 혐의를 받고 있는 삼성 선수들이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급하게 마운드를 수혈했지만, 전력 약화를 피할 수 없었다. 부상을 이유로 대회 출전을 포기한 투타 핵심선수들의 공백도 뼈아팠다. 특히 숙적 일본이 대회를 주도한 나라이기에 안방의 이점을 갖는다는 점, 강한 전력의 사무라이 재팬을 구성했다는 점 등도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예상대로 일본은 대회 중 한일전 준결승 일정을 마음대로 하루 앞당기고, 준결승 심판진 중 1명을 일본인으로 배치하는 등 ‘갑질’을 했다. 김 감독은 “쉽지 않은 대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한국 대표팀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펼쳤다. 각종 국제 대회에서 대표팀의 선전을 이끌며 ‘국민감독’이라는 칭호를 얻은 김인식 감독은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가 됐다.”
지난 1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프리미어12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한국이 4-3 역전승을 거둔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대회 총 28명의 엔트리 중 무려 11명의 선수가 첫 성인 대표팀 합류였다. 경험 면에서 약점을 드러내는 수치지만, 바꿔 말하면 대표팀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대교체의 중심에는 대표팀 야수조의 최고참이자 동갑내기 절친인 정근우(한화)와 이대호(소프트뱅크)가 있었다. 대표팀에서 잔뼈가 굵은 두 선수는 대회 내내 어린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포기하지 않는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등 베테랑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주장을 맡았던 정근우는 일본과 대만을 오가는 힘든 대회 일정 속에서도 특유의 긍정 리더십으로 선수단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했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을 앞두고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상대 공략법을 설명하며 선수단의 기를 살렸고, 경기 후에는 선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겨서) 좋아하는 것은 맞는데 여기서 풀어지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말로 긴장감을 불어 넣기도 했다. 정근우는 “내가 대표팀에서 고참이 됐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그만큼 책임감이 생긴다”고 전했다.
일본과의 준결승전 승리 후 이대호가 선수단에게 지시한 ‘절제 세리머니’도 화제가 됐다. 이대호는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에게 기뻐하는 모습을 자제 시키고 도열 후 관중 인사부터 하도록 유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더 이상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여유를 보여줌과 동시에 매너 있는 승자의 모습이었다. 대표팀의 막내인 허경민(두산)은 “이대호 선배님이 (절제 세리머니)지시했다. 이기더라도 흥분하지 말자고 하셨다. 모두가 그 말에 따랐다”고 전했다.
또 이대호는 일본리그에서 뛴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 투수들 공략법을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과외선생님’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일본과의 준결승전에 나선 일본 투수 4명(오타니, 노리모토, 마쓰이, 마스이)은 모두 이대호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이었다. 일본 히가시스포츠웹은 “이대호는 (준결승전에서) 결승타 말고도 한국 승리에 힘을 보탰다. 오타니는 직구 조준에 이어 3구내 공략 포인트를 잡아 한국 타선이 1안타에 눌렸지만 8회부터 나온 나머지 세 투수 공략법에 대해선 이대호의 조언이 절대적으로 맞아 떨어졌다”고 전했다.
대표팀 한일전 야수조의 과외선생님이 이대호였다면, 투수쪽은 이대은(지바 롯데)이 담당했다. 첫 국제대회 출장이었던 이대은은 “나를 대표팀으로 선발한 이유를 알고 있다.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고, 그의 발견은 이번 대회 ‘큰 수확’이 됐다. 이대은은 긴 마이너리그 생활과 일본리그 경험을 살려 동료들에게 전력분석팀 못지않은 세밀한 조언을 건넸다. 특히나 첫 국제대회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오른손투수 부족에 시달리던 대표팀의 유일한 희망으로 제 몫을 다했다. 국제대회 출전인 이대은은 이번 프리미어12의 수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상 깊은 활약을 했다.
이번 대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은 단연 지난 19일 ‘일본야구의 심장’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준결승전이다. 경기 내내 일본 선발 오타니 쇼헤이(니혼햄)에게 막혀 0-3으로 끌려갔던 한국은 9회 벼랑 끝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내며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역사적으로 얽힌 숙적 일본을 상대로 따낸 극적인 승부에 한반도가 들썩였다. 당시 한일전 순간 최고 시청률은 무려 23.2%(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코리아)나 됐다.
시작부터 쉽지 않은 승부였지만, 경기에 임하는 대표팀의 마음은 결연했다. 이미 일본과의 예선 1차전에서 오타니를 상대로 0-5로 맥없이 당한 한국 대표팀은 ‘두 번은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복수의 칼을 갈았다. 준결승전을 앞두고 김인식 감독은 “도쿄에 왔는데, 선수들이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코칭스태프에서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수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각오가 남다른 모습이었다”면서 “(일본이) 강적인 건 분명하지만, 야구는 끝나봐야 안다”며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김 감독의 말대로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예선 1차전에서 선발로 나서 대표팀을 무실점으로 봉쇄했던 오타니는 여전히 강했다. 한국은 8회까지 이렇다 할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0-3으로 끌려갔다. 패배가 엄습한 듯했지만,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재원 , 정근우
이승엽 특별해설위원은 “영웅이 탄생할 것 같다”는 말로 기대감을 드러냈고, 이윽고 이대호의 방망이에서 역전 적시타가 나오며 대표팀은 승리를 직감했다. ‘약속의 8회’가 ‘기적의 9회’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승엽은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며 후배의 활약에 마음껏 기뻐했다.
이승엽은 지난 2006년 3월 5일 도쿄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예선전에서 1-2로 뒤진 8회 우측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때려내 3-2로 역전을 만들어냈던 장본인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에도 그는 8회 역전 홈런을 때려내 팀 승리를 이끈 바 있다. 이때부터 국제대회에서는 ‘약속의 8회’라는 말이 나왔다.
우연찮게도 일본을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던 이날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날과 같다. 또 다른 역사적 승리가 탄생한 것이다.
김유정 스포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