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가 9회초 2타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연합뉴스
대표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취재진의 질문에 가볍게 인사를 한 뒤 “피곤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동스케줄을 확인해보니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대표팀은 이날 오전 7시 30분 비행기로 대만을 떠났다. 공항에 가기 위해 선수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짐을 챙겨 4시 30분에 숙소를 떠났고, 5시 대만 송산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았다. 3시간의 비행 동안 잠을 청했지만, 불편한 이코노미 좌석에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순철 타격 코치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졸음이 밀려와서 힘들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재균은 오타니 공략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오타니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잠을 재우지 않는다. 잠도 재우지 않고 이동시키는 건 무슨 경우인가”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손아섭은 “피곤한데 참고 있다”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민병헌은 “졸린데 예선전에서 파울볼을 맞은 발까지 아파서 힘들다”며 울상을 지었다.
한국은 유독 불리한 일정 속에서 이번 대회를 치렀다. 개최국 일본의 개막전 파트너로 당첨돼 참가국 가운데 유일하게 삿포로돔에서 경기를 치렀다. 사흘 동안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동(첫날), 삿포로돔 개막전(둘째날), 일본에서 대만으로 이동(셋째날)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개막전부터 차별은 시작됐다. 일본은 자국 축구리그 경기를 핑계로 대표팀에게 삿포로돔 적응 훈련을 허락하지 않았다. 경기 직전까지 삿포로돔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한국은 일본의 ‘괴물’ 선발 오타니 쇼헤이(21·니혼햄)에게 꽁꽁 묶이며 0-5의 완패를 당했다.
황재균, 이대은
한국은 18일 오후 비행기로도 도쿄 입성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이날 오후 8시 훈련 스케줄을 잡아놓은 일본 때문에 도쿄돔 훈련이 불가능했다. 도쿄돔 경험이 없는 선수가 많은 만큼 김인식 감독은 다소 힘들더라도 새벽 이동을 택했다. 오후 1시 도쿄돔 호텔 숙소에 도착한 선수들은 여장을 푼 뒤 곧바로 도쿄돔 적응 훈련을 시작했다.
개막전 패배와 불합리한 대우는 한국 선수들에게 ‘독기’를 품게 했다. 이대호는 “국제대회를 치르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난 건 처음”이라며 “이번 대회는 여러 모로 힘든 것 같다. 그러나 이제 2경기밖에 남지 않았다. 반드시 다 이기겠다. 일본이기 때문에 더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라는 각오를 밝혔다. 일본전에 선발 투수로 낙점된 이대은(26·지바롯데)은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죽기 살기로 던지겠다.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려울 건 없다”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개막전에서 손쓸 틈 없이 당한 오타니에 대한 ‘복수’도 다짐했다. 이순철 타격코치는 “세 가지 작전을 준비했다. 2스트라이크에 몰리기 전에 빠르게 직구를 공략하고, 몰리면 최대한 커트해서 투구 수를 늘린다. 포크볼에는 속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19일 오후 7시 일본야구의 성지라 불리는 도쿄돔에서 프리미어12 4강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시작됐다. 사무라이 재팬’을 응원하는 일본 관중의 함성이 도쿄돔을 가득 메웠다. 일본 선발 오타니가 1회 이용규를 상대로 던진 직구 구속이 160㎞를 기록하자 놀라움의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오타니는 지난 8일 개막전 이후 등판하지 않았다. 열흘을 푹 쉰 ‘괴물’은 더 강해져 나타났다. 한국 타자들은 6회까지 오타니에게 단 1개의 안타도 뽑아내지 못했다. 1루를 밟은 건 2회 몸에 맞는 공을 얻어낸 이대호가 유일했다. 시속 150㎞ 후반대의 직구와 130㎞ 후반~140㎞ 후반의 포크볼, 여기에 슬라이더까지 섞어 던지며 한국 타자들을 제압했다.
3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틴 한국 마운드는 4회 실점을 기록했다. 1사 1·3루 위기에서 히라타 료스케(27·주니치)에게 1타점 좌전안타를 내줘 선제 실점을 한 뒤 시마의 타구를 잡은 김재호의 송구실책으로 추가점을 헌납했다. 김인식 감독은 투수 교체를 지시했다. 이대은이 물러나고 차우찬(28·삼성)이 마운드에 올랐다. 차우찬은 사카모토 하야토(27·요미우리)에게 1타점 희생플라이를 내줬지만, 추가 실점 없이 4회를 마무리했다.
오타니 공략에 실패한 한국은 7회까지 0-3으로 끌려갔다. 오타니의 투구 수는 85개를 기록 중이었다. 그런데 8회가 시작되자 일본 더그아웃이 움직였다. 오타니를 내리고 노리모토 다카히로(25·라쿠텐)을 투입했다. 오타니는 4만 관중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괴물’이 사라졌지만, 한국 타선은 여전히 답답했다. 8회 노리모토를 맞아 삼자범퇴에 그치면서 패배의 암운은 더욱 드리워졌다.
김인식 감독은 9회 선두 타자에 대타 오재원(30·두산)을 기용했다. 오재원은 노리모토를 맞아 좌전 안타를 때려내 출루에 성공했다. 김 감독은 다시 대타 카드를 꺼내들었다. 선발 투입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하던 손아섭(27·롯데)이었다. 카드는 적중했다. 손아섭은 깔끔한 중전 안타를 만들었고, 한국은 천금 같은 무사 1·2루 기회를 잡았다.
한국은 처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근우가 추격의 신호탄을 쐈다. 노리모토의 슬라이더를 공략해 좌익선상을 타고 흐르는 1타점 2루타를 때려냈다. 흔들리던 노리모토는 후속 타자 이용규에게 몸에 맞는 공을 내주며 무너졌다. 그러자 일본은 마쓰이 유키(20·라쿠텐)을 투입했다. 스무 살 어린 투수가 한국의 기세를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한국은 무사 만루 기회에서 김현수가 흔들리는 마쓰이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냈다.
이어진 무사 만루 기회에서 이대호는 바뀐 투수 마스이 히로토시(31·니혼햄)의 4구째 포크볼을 받아쳐 좌익수 왼쪽에 떨어지는 적시타를 때려냈다. 한국은 4-3으로 역전에 성공했고 1루에 안착한 이대호는 오른 주먹을 치켜들며 포효했다.
김인식 감독은 9회말 정대현과 이현승을 투입해 마지막 이닝을 지켜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한국 선수들은 침착했다. 그라운드로 뛰어나가지 않고, 나란히 좌측 선상에 도열해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배려 없는 일정과 불합리한 대우 속에서 개최국 일본의 콧대를 꺾었지만, 환호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승리의 기분을 누리며 야구 강국의 ‘품격’을 보여줬다.
도쿄=유병민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