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일본의 봉건체제를 무너뜨렸던 메이지유신 세력은 반동을 청산하고 오직 더 나은 일본을 꿈꾸며 앞으로만 달려갔다”며 “시민, 지방정부가 ‘아래에서부터 시작하는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제목은 ‘망국(亡國)의 역사와 오늘의 국가운영체계―혁명의 꿈’이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조선의 혼란과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철옹성 같은 기득권을 무너뜨릴 ‘하급무사의 혁명’이 필요하다며 국민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공공경영연구원에서 김병준 교수를 만나 우리나라 국가운영체계와 혁신의 방향을 짚어봤다.
―혁명이라는 단어에 조금 놀랐다.
“국가 운영원리가 작동하지 않으면 다시 체계를 세워야 한다. 그게 혁명이다. 국가로서 대한민국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운영을 관장하는 대통령, 국회, 행정부(관료) 모두 문제의 본질을 읽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바뀌면 좋아질 것 같지만 누가 하더라도 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국가 운영체계가 이미 낡았다. 나라가 고장 난 자동차인데 정치권은 때만 되면 운전사를 바꿔 다시 끌고 가겠다고 한다.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기사가 아니라 차가 문제다.”
―오늘의 정치권을 망국의 조선 세도정치와 비교했다.
“세도정치는 씨족 간 권력 쟁탈전이다.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사색당파는 그나마 정치적 원칙이 있었지만 세도정치는 그것도 없었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었다. 지금 여야 간 싸움이 그런 꼴이다. 정권을 잡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모이자, 이기자’만 있지 이겨서 무엇을 하겠다는 미래 전략과 비전이 없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등을 봐라. 생산적 토론과 합리적 결과 도출은 애당초 목표가 아니었다. 문제 해결보다 문제를 무기 삼아 상대를 찌르는 칼로 쓰고 있다. 서로 겨루다가 힘이 빠지면 그냥 떠나버린다. 국가적 재난을 겪고도 바뀐 것이 없다는 한탄이 그래서 나온다.”
―왜 이렇게 됐나.
“시대 변화에 국가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보자. 권력의 정점에 서서 국민 기대를 한 몸에 받지만 5년 단임, 당정분리 등으로 주도적 국가운영이 불가능하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인식과 ‘이름뿐인 대통령’이라는 현실이 충돌하고 있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속도와 전문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조금 심하게 얘기하자면 이제 박물관으로 가야할 물건이다. 또한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데 공무원 조직, 즉 관료사회가 움직일 리 없다. 미국처럼 정당이 연속성을 가지고 집권하는 구조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우리는 대통령 1인 집권 체제다. 5년 단임이어서 공무원이 빠르게 결정하거나 책임질 일을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나 장관보다 같은 조직에 몸담은 선·후배를 동업자처럼 밀고 당기는 이익집단으로 바뀌었다. 사람 문제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중앙에 집중된 국가권력을 횡(가로)과 종(세로)으로 나눠야 한다. 조합주의 도입과 권한 분산이 핵심이다. 대통령과 국회는 지속발전위원회, 노사정위원회, 교육개혁위원회 등의 독립위원회에 실질적인 권한을 주고 여기에서 결정된 내용을 최대한 존중하고 집행하면 된다. 국민의 다양한 요구와 복잡한 사회현상, 급속한 국제환경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엉터리 지방자치를 바로잡아 중앙정부가 갖고 있는 경찰권, 교육권, 산업경제권, 조세권 등을 대폭 지방으로 이양해야 한다. ‘법은 때에 따라 제정하는 것이니 때가 바뀌면 법도 바꿔야 한다’고 율곡 이이 선생이 말했다. 율곡 선생이 대대적인 국가개혁을 외쳤지만 20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았다.”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가.
“현상을 쫓아가는 단기처방이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올바른 인재를 키우지도 못하면서 모든 학생을 대학으로 몰아넣는 입시위주 교육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롯데리아 등이 사내대학을 만들어 청년이 고교 졸업 후 취업과 학위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미용, 요리, 제과·제빵 등은 당연히 현장에서 돈 받아가며 마이스터로 성장해가야 하는데 대학에 등록금을 내고 배우는 모습은 학생에게도, 대학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대학이 독점하고 있는 학위시장을 깨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대학은 재취업자, 명퇴자 등의 재교육 기능을 강화해 학생 감소 문제를 해결하게 해야 한다.”
―노동개혁이라고 하지만 노사 문제도 전혀 진척이 없다.
“손해 볼 것 뻔히 아는데 한쪽으로 몰아세우면 누가 가만히 있겠느냐. 납득할 만한 탈출구를 만들어놓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바로 사회안전망이다. 우리나라는 취업자를 위한 재교육이 거의 없어 길거리로 나앉는 순간 장기 실업자로 전락한다. 당사자는 목숨 걸고 저항할 수밖에 없다. 쌍용차 문제가 대표적이다. 동일임금으로 재취업 가능한 직장이 없는데 왜 저항하지 않겠나. 안전망에 대한 국가 전략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과 사회안전망을 갖추면 경제가 좋아지는가.
“기본을 갖추면 사회가 역동성을 찾을 수 있다. 재교육에 의한 직업 이동과 청년 조기 취업이 늘어나면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 이런 조건 위에서 국가의 서비스산업 육성정책 등으로 산업구조를 바꿔야 한다. 자본시장 육성을 위해 고리대금업 수준인 금융업을 개혁해 투자기능을 확대하고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정부 몫이다. 그렇게 해서 한계기업이 정리되고 신산업이 등장하면 시장에는 활력이 생기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모든 것을 대통령이나 집권당의 획일적 지시나 통제로 결코 이룰 수 없다. 사회구성원 모두 공동체를 위해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지금 정치권은 눈앞에 이익만을 좇아 문제의 심각성을 모를 뿐 아니라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득권(권한)을 내려놓고 새로운 판을 짜는 게 불가능할 것 같다.
“이걸 못하면 망한다. 국민이 국가를 믿지 못하면 국가는 끝난 것이다. 국가 부문에서 선제적으로 혁신의 길에 나서야 한다.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하는 권한을 모조리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딱하다. 국회를 봐라.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또 할 수도 없으면서 시골 면장이 할 권한까지 쥐겠다고 한다. 뷔페식당에 가서 먹지도 못할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있는 꼴이다. 스스로 내놓지 않으면 국민이 이를 내려놓도록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 추세이자 시대적 요구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변화를 주도할 세력이 없다.
“과거처럼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과 같은 가치집단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기성 정치권에 흡수돼 이익집단의 대표자로 전락한 측면이 있다. 이제 이해 당사자가 직접 나서야 한다. 대학생, 자영업자 등이 대표적이다. 청년실업, 자영업 생태계 파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중앙집권에 희생된 지방이 일어나야 한다. 지방 문제도 지방 경쟁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 행정, 제도의 문제가 함께 작동한 결과다. 국가는 이미 힘센 이익집단에 끌려가고 있어 국민이 행동하지 않으면 더욱 손해를 본다. 그래서 하급무사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한 것 아닌가.
“정당과 같은 ‘공간’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된다. 기득권과 경쟁하면 차별성이 없어지고 오히려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시도는 수도 없이 있었다. 모두 실패했다. 기성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봉건체제를 무너뜨렸던 메이지유신 세력은 반동을 청산하고 오직 더 나은 일본을 꿈꾸며 앞으로만 달려갔다. 대한민국의 시민 한 명이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개혁, 경쟁 없는 중앙정부 대신 자유롭게 경쟁하는 지방정부,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분권적 국가운영체계를 만들어내는 일 등이 바로 혁명이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더 빠른 길이다. 동네가 바뀌면 나라가 바뀐다. 내가 국가의 주인이고 내가 대통령이라는 마음으로 동네와 지방정부를 바꾸는 일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혁명과 혁신의 전국 네트워크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계완 정치평론가 jkw68@hanmail.net
김병준, 박 대통령에 ‘돌직구’ “국민을 걸고 하는 도박정치는 안돼” “우선 대통령의 자신감에 놀랐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고 진실한 사람을 뽑아달라는 대통령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하면 국민이 심판해줄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게 허망하다. 오히려 대통령에게 그런 자신감을 심어줬던 우리 국민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김 교수는 유승민 의원의 부친상에 대통령 이름의 조화가 없었던 것에도 쓴소리를 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큰 지도자로 비치면 안 되나. 원수라도 죽은 사람 앞에 예를 갖추는 게 우리나라 풍습이고 예의범절이다. 조화 보내면 화해했다고 할까봐 보내지 않았을까. 이런 일에 직언하지 못한 참모도 한심하다. 결과적으로 대통령 체면을 송두리째 깎아버렸다.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에 있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으면 나는 반드시 보냈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 대표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분파주의자’, ‘싸움꾼’이라고 수도 없이 공격했다. 본인이 역지사지해볼 때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가운영능력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인색했다. “대통령은 잘 모르면서 소신이 강하다. 소신은 고집으로 읽힐 수 있다. 잘 모른다는 말은 무식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현상의 본질과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혼이라는 말로 언급했지만 다양성 안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있었다. 다양성은 꺾어서도 안 되지만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박정희 정권처럼 국가가 나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소신은 시대착오적이다.” 정쟁의 중심에 대통령이 있어 지켜보는 국민이 힘겹다는 지적에 김 교수는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말로 이렇게 꼬집었다. “본인이 당 대표이거나 대통령 후보이면 자기 운명을 걸고 정치 실험을 할 수 있다. 개인이거나 특정 계파의 수장이면 도박처럼 정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국의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나라를 걸고, 국민을 걸면 안 된다. 윷놀이의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이기든 지든 국민만 불행해진다.” [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