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시간) 유엔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방북을 공식 인정했다. 그동안 반 총장의 방북에 대해 ‘노 코멘트’로 일관하던 입장에서 한 발 나아간 것이다. 반 총장의 방북은 이제 시기만 남았다는 게 중론이다. 반 총장의 일정이 다음 달 초순까지 꽉 차 있지만 빠르면 올해 안에 방북이 성사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유엔 관계자는 “반 총장이 방북을 추진하는 것은 사실이다. 복수의 날짜를 놓고 일정을 조율하는 상태”라고 밝혔다.
반 총장의 방북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여의도 정치권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방북도 방북이지만 그 시기가 절묘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부쩍 ‘대망론’이 언급되던 반 총장이다. 친박계 핵심인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이 개헌론을 꺼내들며 ‘반기문 대망론’에 불을 지핀 게 불과 일주일 전이다. 홍 의원은 12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20대 국회에서는 개헌을 해 권력구조를 이원집정부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반기문 대통령에 친박 총리 조합이 회자되고 있다’는 질문에는 “옳고 그르고를 떠나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언급해 잔잔한 파장을 몰고 왔다.
마땅한 대선 후보군이 없는 친박계가 반 총장을 대권 후보로 밀고 있다는 것은 정치권에서 이미 정설이 된지 오래다. 홍 의원의 발언에 청와대와 친박계는 “개인적인 견해” “뜬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어찌됐건 ‘개헌론’과 반 총장을 묶어 여론의 향방을 떠보는 데는 성과를 본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한 정치권 관계자는 “어차피 개헌론과 반기문은 또다시 떠오르게 돼 있다. 친박계에서 홍 의원이 완장을 차고 오히려 먼저 제기함으로서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를 본 셈이다. 일종의 ‘애드벌룬’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개헌론과 반기문’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운 효과는 곧장 나타났다. 당장 정치권에서 ‘반기문 대통령-최경환 국무총리’ 조합이 회자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반 총장이 여야 유력 대권주자들을 제치고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도 쏟아졌다. 여기에 반 총장을 대놓고 지지하는 정치조직 ‘친반(親潘)연대’가 결성되기도 했다. 친반연대는 지난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창당준비위원회 결성 신고까지 마친 상태다. 정작 반 총장의 측근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발끈했지만, 친반연대는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이슈화에 성공했다. ‘개헌론-여론조사 1위-지지세력 창당’ 등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의 밑그림은 이렇게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방북설’이 불거지자 반기문 대망론은 더욱 탄력을 받고 있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청와대 교감설’까지 제기되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전혀 몰랐다’라는 반응이다. 김규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언론 인터뷰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관계 부처인 외교부나 통일부 등 정부 관계자들마저 이날 일제히 입을 닫았다. 여권의 한 초선 의원은 “너무 세게 부인하니까 오히려 뭔가 있는 것 같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처럼 청와대가 반 총장 방북설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다를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반 총장이 북 측에 방북의사 전달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게 최소한 ‘귀띔’ 정도는 해줬을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이 직접 얼굴을 보고 수 차례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박 대통령은 유엔총회 참석 차 뉴욕을 방문해 반 총장과 공식·비공식적으로 7차례나 만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박 대통령의 뉴욕 첫 일정은 반 총장과의 만찬이었다. 이 자리에선 ‘북핵’ ‘통일’ 등 한반도 현안이 주로 언급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북한 리수용 외무상도 유엔총회 방문 차 뉴욕에 있었다. 대북소식통을 종합하면 반 총장이 방북 의사를 전달한 채널이 바로 ‘리수용 외무상’이다. 리 외무상은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스위스 유학 시절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만큼 김정은과 가까운 리 외무상이 현재 방북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는 관측이 파다하다.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의 ‘핑크빛 기류’와 방북의사 전달 시기 등이 묘하게 맞물리며 ‘사전 교감설’에 무게가 실리는 모양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 청와대에서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을 영접, 기념촬영을 하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하지만 설사 청와대가 반 총장의 방북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더라도 지금으로선 어떻게 나설 수가 없는 상황인 것으로 파악된다. 변수는 반 총장의 방북 의지가 아니라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도 반 총장은 개성공단 방문을 위해 방북을 추진했지만 북한이 하루 전날 갑자기 철회를 하는 바람에 체면을 구긴 바 있다.
당시 정부는 통일부 명의로 보도자료를 내고 유감을 표명했다. 대북 전문가들은 그때의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방북 일정이 계속 오락가락한 것을 두고 “북한이 반 총장의 방북을 허용해 놓고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 여부에 대해선 확답을 주지 않아 (방북) 일정을 확정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관건은 반 총장이 북한과 어떤 방식으로 조율을 끝낼지에 달려 있다. 만약 방북 일정이 확정되고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까지 성사된다면 반 총장은 ‘통일·외교 대통령’ 후보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것으로 보인다. 개헌론-여론조사 1위-지지세력 창당과 더불어 ‘남북통일’이라는 시대정신까지 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는 셈이다. 반 총장의 유엔총장 임기가 20대 대선을 불과 1년 앞둔 내년 12월 말이라는 사실도 방북 이후 ‘반기문 대망론’이 현실화될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역대 대선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톡톡히 해 온 충청권이 반 총장의 지역기반이라는 점에서 그 파괴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충청권 의원실 한 관계자는 “충청의 대표 주자였던 이완구 전 총리가 나가떨어지면서 충청은 사실상 반기문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더욱이 반 총장과 친박계의 연대는 충청과 TK의 연합으로 폭발성이 더욱 클 것으로 관측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반 총장은 지지율이 높아 연대 가능한 대상이 폭넓다”며 “여권 내 TK세력과 친박은 물론 친이 또는 중도 소장파와 손잡을 수 있고 심지어 야당과도 연대를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