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 위치한 우토로 마을은 지금이라도 쓰러질 듯한 같은 낡은 건물이 즐비했고 하수로는 물이 불어나면 금방이라도 넘칠 정도로 얕았다. 위부터 슬레이트로 지어진 집,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는 팻말, 우토로 마을 초입에 있는 벽화.
“많은 눈물과 많은 고통과 많은 슬픔과 많은 웃음과 많은 기쁨과 많은 인연이 우토로에서 생겼다. 앞으로는 웃음과 기쁨만이 남기를 앞으로도 인연이 넓혀지기를.”
빗물로 얼룩진 벽들, 얼기설기 엮인 지붕들. 한눈에도 남루한 마을 초입에는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에 적힌 한글은 이곳이 바로 우토로 마을임을 알려주었다. 오사카 시내에서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마을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토요일 낮임에도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우토로 마을은 1941년 일본 정부가 교토 비행장을 만들며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생겼다. 비행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1300여 명이 생활했던 숙소 ‘함바’가 마을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일본이 1945년 패전하면서 교토 비행장 건설은 중단됐고, 일하던 조선인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됐다. 여러 사정으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이 터를 잡으면서 생긴 마을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주민들은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디아스포라로 살아왔다(디아스포라의 사전적인 의미는 ‘흩어진 사람들’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뜻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흩어진 사람들로 광복 이후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온 이들을 의미한다).
조국은 광복했지만 현지에 남은 우리 민족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이어지는 차별과 멸시만으로도 버거운데, 여러 번 퇴거명령을 받으며 살던 곳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닛산차체주식회사의 소유였던 땅을 얻기 위해 주민들은 1971년부터 협상을 벌였다. 닛산차체는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1987년 우토로 주민자치회에 땅을 팔았다.
사진 작업을 하며 우토로 마을에 대해 공부했다는 이재갑 작가는 “성금과 주민들 돈을 모아 땅을 샀지만 당시 주민 자치회 대표가 4억 5000만 엔을 받고 땅을 서일본식산(부동산 회사)에 팔아버렸다. 그리고 대표는 1억 5000만 엔을 들고 야반도주해버렸다. 경찰에 신고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는데도 마을 주민들은 가만히 있었다. 왜냐고 물어보니 한 주민이 ‘같은 조선인끼리 소송 벌여 뭐하나. 일 커지면 우리 민족에 대한 인식만 나빠지지 않냐’고 답하더라”고 설명했다. 퇴거를 요구하는 서일본식산을 상대로 주민들은 소송까지 벌였으나 지난 2000년에 결국 패소하고 말았다.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가 된 이들에게 손을 내민 건 한국 정부와 양국의 시민들이었다. 정부에서 30억 원을 지원했고, 우토로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이 이어져 지난 2008년 마을의 1/3 크기의 부지를 살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에 아파트를 지어 함께 살 계획이다.
우토로 마을을 한 바퀴만 돌아봐도 70여 년간 이어진 이곳에서의 고단한 삶을 읽을 수 있었다. 하수로는 비가 와 물이 불어나면 금방이라도 넘칠 정도로 얕았다. 하수로 위에 간이 화장실이 망가진 채 놓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 사용했던 것처럼 보였다. 이곳은 하수도는커녕 상수도조차 뒤늦게 설치됐다. 1988년까지 우물을 퍼 올려 생활할 정도였다. 지대가 낮은데다 상하수도 설치가 안 돼 비만 오면 오물이 흘러넘쳐 악취가 진동했다. 마을의 오래된 나무 건물 밑 부분에는 하나같이 반복적으로 침수돼 생긴 얼룩이 남아 있었다.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건물에는 모래주머니가 둘러져 있었다. 물이 들어오는 걸 막으려는 방편으로 보였다.
담벼락이나 표지가 없어도 마을의 경계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깨끗한 2층짜리 주택이 늘어서 있다. 우토로 마을에는 새로 지어진 몇몇 건물을 빼고는 하나같이 낡고 지저분했다. 벽은 먼지와 그을음이 묻어 까맣게 변해 있었고, 얼기설기 지어진 목조 건물과 슬레이트로 지어진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주인이 떠나 빈 집도 많았다. 마을 뒤편 철제 펜스에는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이재갑 작가는 “건물들을 자세히 보면 한국식 성이나 이름이 적힌 문패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고국의 누구도 이곳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에도 이분들은 한국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지켜왔다”고 설명했다.
우토로 마을 같은 조선인 집단 거주지역이 일본 전역에 걸쳐 있다. 조선인들이 모여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차별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집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고, 낮은 임금을 받던 조선인들이 감당하기에는 집값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때문에 사람이 살기엔 열악한 상습침수지역, 국유지 등에 가건물을 짓고 살았다. 이런 마을들은 일본인들에게 ‘슬럼’ 취급을 받으며 무시와 핍박의 대상이 됐다. 때문에 우리 민족은 똘똘 뭉쳐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우토로 마을은 대한민국 정부의 도움과 시민들의 관심 속에 생존권을 지켜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제2, 제3의 우토로 마을들이 있다. 일정의 마지막 날인 11월 1일, 취재진은 오사카로 향했다. 화려하고 거대한 크기의 천수각으로 유명한 관광지 오사카성 인근에는 또 하나의 우토로가 있었다. 아파치 마을이다.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남겨진 곳이다.
오사카성 인근의 조선인 거주지 아파치 마을. 이곳 또한 우토로 마을과 마찬가지로 주거환경이 열악했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철길 아래 집이 있던 자리.
과거 오사카 성 인근에는 오사카 병기 제조창이 있었다. 115만 제곱미터(35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군수 물자 생산 공장이었기에, 미국은 50여 차례에 걸쳐 공습해 인근을 초토화시켰다. 아무도 살지 않게 돼버린 곳에 조선인들이 흘러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1950년대, 초토화된 병기 공장에서 고철을 캐내 파는 게 아파치 마을 주민들의 거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일본 정부는 국유재산이라는 이유로 고철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았고, 경찰의 단속으로 고철을 훔쳐 강을 건너던 조선인이 물에 빠져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곳 마을 주민들에게 지난 70년은 가난과 핍박이 점철된 시간들일 것이다.
아파치 마을 위로 철길이 지났다. 오사카성 역으로 이어진 대로에서 철길 밑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 내려오면 마을이 보인다. 철로 밑 굴다리 옹벽에는 무언가 설치돼 있었던 것처럼 하얗게 색깔 차이가 났다. 이재갑 작가는 “바로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 집이 있었다. 철길을 머리에 이고 수십 년을 살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자가 정말 여기에 집이 있었냐고 몇 번을 되물었을 만큼 열악한 곳이었다. 이곳에 살던 우리 민족은 하루에도 수십 번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를 들으며 생활을 하고 잠을 잤을 것이다.
한때 180가구가 넘게 살았던 아파치 마을은 시간이 흐르며 더욱 쇠락해갔다. 마을 바로 앞으로 네코마 강이 흘렀다. 이곳 역시 강이 범람하면 여지없이 잠겼을 정도로 낮은 지대에 위치했다.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사이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낡은 집들이 보였다.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2층 집은 곳곳이 녹슬고, 슬레이트가 벌어져 위태로웠다. 2층에 난 창으로 널어놓은 빨래가 보였다.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비슷한 모습의 슬레이트 가건물은 골목 사이사이에 있었다. 나무판자를 연결해 붙인 건물은 판자 사이가 다 벌어져 추위도, 더위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간유리가 달린 현관문은 반쯤 깨져 신문지로 막아뒀다. 이곳 역시 에어컨 실외기가 연결된 것으로 보아 빈집이 아니었다. 지난 70년 한국은 몰라볼 만큼 발전했지만, 아파치 마을의 시계는 멈춰 있었다.
<일요신문>은 나가사키에서 오사카까지 돌며 일본에 새겨진 우리나라 사람들의 흔적과 현재를 짚어봤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낯선 콘크리트 섬 지하 갱도에서 굶주림과 고통을 참으며 죽어갔던 조선인들, 원폭 피해를 입었지만 누구도 돌봐주지 않던 이들, 차별 속에서도 한민족의 정서를 잊지 않고 지켜낸 재일동포들. 모두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과거와 현재다.
오사카=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정착 성공 사례’ 쓰루하시 코리아타운 한국문화 체험 관광명소 ‘각광’ 우토로, 아파치 마을과 달리 당당하게 일본 속 작은 한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곳도 있다. 일본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규모 한인타운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이다. 아파치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사카 이쿠노구에 위치한 이곳은 1920년대부터 형성된 곳이다. 이곳 역시 근처 히라노 운하 건설을 위해 한국인들이 동원되면서 생겼다. 동네 한 가운데에는 한국물건을 사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시장이 600m 길이로 형성돼 있다.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의 입구(왼쪽)와 한복집. 11월 1일 오전, 취재진은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을 찾았다. 마을 초입부터 김치를 광고하는 대형 간판이 걸려 있었다. 과거 ‘조선시장’이라고 불렸던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은 재일동포들만 찾는 곳이 아닌 전국적인 관광명소다. 한류가 휩쓸면서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았다. 높이 솟은 기와지붕 입구가 이곳이 코리아타운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했다. 시장으로 들어서자 이곳이 일본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곳곳에선 한국말이 들리고 간판 역시 대부분 한글로 적혀 있었다. 한국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네 시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떡볶이, 어묵, 김밥 등의 길거리 음식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김치, 젓갈을 파는 반찬가게도 줄지어 있었다. 실내포장마차부터 보쌈, 떡집까지 없는 게 없었다. 2층짜리 규모의 한복집도 두 군데나 있었다. 취재진과 동행한 기무라 히데토 씨는 “일본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며 물건을 한아름 들고 웃었다. 시장 한가운데 제법 큰 규모의 반찬 가게에 특이한 물건이 있었다. 쇼윈도 안에 터미네이터 모형이 한 손엔 배추김치를, 한 손에 무를 들고 서있었다. 재밌는 모습에 웃었지만 이재갑 작가는 “웃으라고 둔 물건이겠지만 저게 한국인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불멸의 터미네이터가 김치를 든 모습은 핍박하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일본 땅의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상인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각지 사투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한국인 취재진 일행을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식당 앞에 선 앞치마를 두른 여성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니 시큰둥한 얼굴로 “네”라고 답하곤 식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타지에서 본국의 도움 없이 자립한 이들의 서운함이 아니었을까. 제법 번화한 쓰루하시 코리아타운을 보며 “그래도 이곳 재일동포들은 잘 정착해 성공한 케이스인 것 같다”고 말하자 이재갑 작가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장 뒤편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아파치, 우토로에서 본 것 같은 낡은 집이 많다. 우리가 본 모습이 다가 아니다”고 말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