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 마을의 마지막 남은 1세대 강경남 할머니는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줬다.
우토로 마을에는 사전 약속을 하지 못하고 방문했기에 누군가를 만날 거라 기대할 수 없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외에 마을에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주민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고 떠나려는 순간 익숙한 얼굴이 취재진의 차 옆을 지나갔다. 강 할머니였다. 급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할머니께 인사를 건넸다.
갑자기 들리는 한국어에 강 할머니는 반갑고도 놀란 얼굴로 취재진을 맞았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마을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손녀라도 대하듯 편한 말로 “어디서 왔노”라고 기자에게 물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답하자 “아이고. 멀리서 왔네. 한 5년 전 서울 갔다”며 고국의 얘기를 꺼냈다.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 등의 자잘한 쓰레기를 주우며 할머니는 마을을 안내했다. “저 가서 쪼매 있으면 사람 있응께 같이 가”라며 일행을 이끌었다. 할머니는 매일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 점심식사 후에 동네를 산책한다. “건강하고 젊어보인다”고 말을 건네자 강 할머니는 빠진 앞니를 보이며 환히 웃었다.
기자의 서울 억양을 알아듣기 힘들어 하던 할머니는 “고향이 어디시냐” 묻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상남도 사천군 용현면”이라고 답했다. “한국사람 보면 하모 반갑지. 우리 고향 사람인데”라는 할머니의 말에서 ‘고향’이라는 단어는 유독 울림이 컸다. 일행의 고향을 한 명씩 묻더니 부산이라고 답하는 일행에게 “부산은 쪼매날 때나 가봤지. 내 일본 올 때 8살 묵어서 왔으니께네. 부산이 어디인고 그걸 아나. 배 타고 와가꼬”라며 말끝을 흐렸다.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텅 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국에 가봤자 아무도 없는데 뭐. (5년 전에) 우리 조선 땅 보고 안 왔나. 내 고향에 가 봐도 내 쪼만할 때 있었던 사람들 다 죽고 읎다.”
할머니는 이곳 우토로에서 8살 이후 평생을 살았다. 남편을 만났고 자녀들을 낳았다. 강 할머니는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다들 일본에 있다. 우토로에도 살고 다른 데도 살고”라고 설명했다. 언제까지 우토로에 사실거냐고 묻자 단호한 표정으로 “죽을 때까지 있어야 안 되나.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다 여기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아는 사람들도 다 여기에 있고”라고 말했다.
빠듯한 일정 탓에 가봐야 한다고 말하자 할머니 얼굴에 서운함이 떠올랐다. “와? 와 갈라카노. 아이고. 그러면 쩌그 가서 얘기하고 놀면 되는데. 천천히 얘기도 하고 그랬으면 좋을텐디”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 할머니는 차량으로 돌아가는 일행에 손을 흔들며 80년 세월에도 잊지 않은 고향 민요를 불렀다. “바쁜데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더.” 할머니의 서운한 표정과 목소리가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