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 퓨 굿맨>(A Few Good Men)의 한 장면이다. 군의 비리를 파헤치던 주인공 캐피 중위(톰 크루즈 분)가 피의자에게 던진 제안인데,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서 발생한 끔찍한 폭행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던 중 핵심 증인이 자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에 처하자 피고인에게 던진 제안이다. 본인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하는 대가로 검찰 측이 형량을 낮추거나 가벼운 죄목으로 다루기로 하는 거래인데, 영미권에서는 이를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이라고 부른다. 유죄협상제, 사전형량조정제도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난 5월 13일 포스코 협력업체 코스틸 박재천 회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 최근 박 회장은 이례적으로 검찰 구형의 2배인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정말 뉘우치고 있습니다.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저만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직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많이 뉘우쳤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청년들을 위해 기업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조상준)의 포스코 수사 중 비리가 포착돼 재판에 넘겨진 박재천 코스틸 회장의 결심공판 최후진술이다. 몸이 불편한 듯 힘들어하던 그는 준비해 온 원고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며 재판부의 선처를 호소했다.
검찰도 “박재천 회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며 피고인 편을 들었다. 의외였다. 검찰의 구형은 징역 2년 6월. 징역 3년 미만의 경우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한 점을 고려할 때 재판부에 ‘집행유예를 선고 해 달라’고 대놓고 요구한 셈이다.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검찰 수사 단계로 돌려보자. 드러난 박재천 회장의 범죄 혐의는 135억 원의 회사 돈 횡령. 금액이 크기 때문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이 적용됐다. 특가법 적용 대상이므로 당연히 양형 기준이 높다. 최저 형량이 5년이다. 심지어 박재천 회장은 수사 초기 증거 은닉을 시도한 정황도 있었다.
그럼에도 검찰은 최저 양형을 무시하고 박 회장에 대해 징역 2년 6월을 요구했다. 법원은 재판부 권한으로 최저 기준 5년에서 절반까지 양형을 낮춰 줄 수 있는데, 검찰이 재판부의 권한까지 끌어다가 구형을 한 셈이다. 플리바게닝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검찰은 포스코의 윗선과 가깝게 지내면서 특혜를 받았던 박재천 회장의 진술이 꼭 필요했다. 박 회장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검찰은 횡령 혐의를 포착하고 박 회장을 압박했다. 증거 인멸을 시도했던 박 회장은 검찰의 수사에 백기를 들었고, 적극 협조했다. 정준양 전 회장을 향해 수사를 진행하기 위해 박 회장을 포섭해야 했던 검찰의 수사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검찰 수사 협조의 대가로 매우 낮은 형량을 구형한 셈이다.
그런데 법원은 이를 무시했다. 통상 검찰 구형의 3분의 2만 선고해도 ‘양형이 세다’고 표현하는데 박재천 회장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는 검찰 구형의 2배인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다만 검찰의 요청으로 1심 재판 중 받아줬던 박 회장의 병보석은 유지 시켜줬다. 병보석 유지가 검찰의 플리바게닝을 인정해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거나 박재천 회장이 1심에서 모든 죄를 인정하고 뉘우친다고 호소한 점, 횡령 금액을 어떻게 배상할지 구체적인 계획서까지 법원에 제출했음에도 징역 5년이 선고된 점을 감안하면, 2심에서 박재천 회장이 감형이 된다고 해도 집행유예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징역 5년을 집행유예가 가능한 징역 3년 미만으로 낮추려면 유무죄 판단이 바뀌어야 하는데, 1심에서 혐의를 인정한 박 회장이 2심에서 태도를 바꿔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검찰이 포스코 비리 의혹의 ‘몸통’으로 겨냥한 정준양 전 회장. 최준필 기자
그러다보니 검찰 내에서는 이번 판결에 대해 불쾌하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플리바게닝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몇 차례 도입을 희망했다가 우리나라 정서 탓에 실패했던, 다시 공론화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수사 상황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기업 수사에 잔뼈가 굵은 검사의 말을 들어보자.
“20년 전만 해도 때리거나, ‘제대로 협조 안 하면, 다른 범죄도 찾겠다’는 식의 협박으로 구슬리면 다 털어놨죠. 특히 기업인들은 잔뜩 겁먹고, 먼저 와서 자기가 다 얘기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럼 그때 일부 혐의는 제외해주고 본류에 해당하는 혐의만 기소하면 됐죠.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백팔십도 달라진 거죠.”
‘추억’을 뒤로하고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얼마나 영악한데요.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는 소문이 돌면 변호사가 먼저 가서 다 조율해 줍니다. 검찰이 뭘 들고 있는지 알기 전에는 혐의를 인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먼저 증거를 은닉하는 방법도 가르쳐준다고 합디다. 그러다가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검찰에 있는 게 확인되면 그때 다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현실이 이런데 우리(검찰)가 부른다고 와서 겁먹고 자기 죄를 먼저 털어놓겠습니까?”
특히 기업인의 경우 검찰 수사와 재판이 끝난 뒤에도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포스코 수사를 받던 협력업체 장 아무개 대표가 정·재계 실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와 전화를 남기고 검찰 수사 도중 휴대폰을 화장실 변기통에 버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 검찰 입장에서는 증거 중 진술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늘어나는 것도 플리바게닝을 원하는 주요 배경이다. 최근 들어 기업의 배임 사건이 늘고 있는데, 배임 혐의는 회사에 손해를 끼칠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잘못된 결정을 고의로 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당연히 그런 내용은 보고 서류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설사 보고를 올려도, 배임을 저지른 결정권자가 “다시 서류를 올리고 기존 것을 기록에 남기지 말라”고 지시하면 끝이다. 구두 지시와 서류 초안, 그 내용은 서류 작성자(일반적으로 부하직원)가 검찰에 자백하지 않으면 찾아낼 수가 없다.
가장 빈번한 뇌물 사건 역시 “돈을 준 것은 수주를 따내기 위해서”라는 대가성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 대가성은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당시 상황과 과정을 검찰의 해석과 추측으로 법원에 사건을 넘겨야 한다. 유죄를 받기 위한 치열한 법정 다툼은 불가피하다. 법원이 뇌물로 넘겨진 혐의 전부를 유죄로 인정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다보니 검찰은 플리바게닝의 필요성을 늘 강조한다. 물론 공론화되지 않은 영역에서 음성적으로 검찰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도 없지 않다. 앞선 사례처럼 구형도 있고, 기소유예나 공소보류도 가능하다. 공소보류는 주로 공안 사건 협조자에게 주는 플리바게닝 중 하나다. 혹은 보석 허가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해, 수사 협조자의 신병을 도와주는 방법이 있다.
그럼에도 검찰은 스스로 플리바게닝을 온전히 휘두르고 싶어 한다. 수사 참고인들이 가장 원하고, 가장 강력한 ‘양형’은 검찰이 아무리 구형으로 의견을 제시해도 법원이 받아주지 않으면 ‘말짱 꽝’이기 때문이다.
남윤하 언론인
잠깐 - 플리바게닝이란?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하는 대가로 검찰이 형량을 경감하거나 조정하는 협상제도. 우리나라에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