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증권가·기관투자가들은 월드타워점 사업권 재승인 실패 등 롯데의 면세사업이 큰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은 신동빈 롯데 회장과 월드타워점 매장 전경. 이종현·박은숙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15일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사업 재승인 실패에 대해 “99%는 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날 관세청의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 발표에서 월드타워점 면세사업권을 재승인받지 못한 충격을 대신한 말이었다.
지난 14일 관세청 발표 이후 재계에서는 지난 23년간 면세점을 운영해온 SK의 탈락보다 롯데가 월드타워점 운영을 멈춰야 한다는 사실을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SK는 비록 동대문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면세사업을 확장하겠다는 의욕을 보이기는 했지만 다른 경쟁사들보다 면세사업에 큰 뜻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 내부에서조차 “면세사업 비중을 늘리거나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롯데의 사정은 다르다. 롯데와 신동빈 회장 입장에서는 연매출 5000억 원에 달하는 월드타워점을 놓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면세점 재승인 심사가 있기 전부터 재계에서는 월드타워점의 재승인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롯데는 제2롯데월드 건립과 함께 월드타워점을 10년 내 연매출 4조 5000억 원이 넘는 세계 1위 면세점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계획을 천명했다. 게다가 지난해 ‘롯데월드점’에서 ‘월드타워점’으로 변경하면서 3000억 원가량을 투자했다. 그러나 월드타워점 사업권을 연장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면세사업에 대한 롯데의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또 국내 1위, 글로벌 3위 면세사업자라는 위상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신 회장은 “상상 못한 일이 일어났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재계 일부에서는 롯데가 서울시내 면세점을 모두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적지 않았다. 가족 간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룹 경영권을 두고 가족 간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기업에 국가 허가사업인 면세사업권을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여론이 강했던 것. 재계 관계자는 “롯데 입장에서 소공점을 지킨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서 “정부도 최고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소공점보다 잠실점(월드타워점) 사업권을 박탈하는 게 부담이 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신 회장은 면세사업권을 모두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신 회장은 롯데문화재단 설립, ‘롯데 액셀러레이터’ 지원, 청년희망펀드 기부 등에 무려 270억 원의 사재를 쏟아 부었다. 신 회장의 잇단 기부 행렬을 재계에서는 경영권 다툼으로 훼손된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고 면세사업 박탈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함에 비롯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롯데 면세점 소공점. 임준선 기자
롯데는 월드타워점 사업 재승인 실패를 현재 운영 중인 코엑스점을 활용해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2017년 특허가 만료되는 코엑스점을 월드타워점으로 옮길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월드타워점 탈락의 충격은 단순히 면세점 한 곳을 놓친 것에 그치지 않고 신동빈 회장과 롯데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월드타워점이 탈락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서울 소공로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거점으로 하는 유통 라이벌 신세계가 차지했다는 점이 롯데로서는 가장 위협적인 부분이다. 연매출 2조 원에 육박하는 롯데면세점 소공점과 불과 5분 거리에 신세계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들어선 것이다. 지난 7월 서울시내 신규 면세사업자 선정 당시 롯데가 신세계를 가장 경계했다고 알려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신세계는 신규 면세사업자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재도전 끝에 결국 사업권을 따냈다. 관세청의 사업자 선정 발표 직후부터 신세계는 면세점 사업에 대한 의욕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신세계는 “면세점 구성·오픈·운영 준비에 본격적 착수해 빠르면 내년 4월 말, 늦어도 5월 중 신세계백화점 본점 신관에 시내면세점을 오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명동-신세계백화점-남대문시장-숭례문-남산’으로 이어지는 관광벨트를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동대문을 거점으로 한 두산이 새로운 면세사업자로 등장한 것도 롯데로서는 껄끄러운 일이다. 롯데는 또 지난 7월 신규 사업자로 선정된 용산의 HDC신라면세점, 여의도의 한화 갤러리아면세점과도 경쟁해야 한다. 특히 용산을 거점으로 한 HDC신라면세점과 다툼은 신세계와 경쟁 못지않게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재계와 증권가, 기관투자가들은 롯데의 면세사업이 큰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매출 5000억 원을 기록하고 있는 월드타워점의 사업 연장 실패와 함께 경쟁이 치열해질 소공점에서도 연간 5000억 원가량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를 합하면 롯데는 면세사업에서만 연간 1조 원가량의 매출이 깎여나가는 것이다.
이는 면세사업을 운영하는 호텔롯데 상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호텔롯데의 전체 매출액 4조 7165억 원 중 롯데면세점 소공점과 월드타워점의 매출은 2조 4583억 원으로 절반이 넘는다. 매출 하락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호텔롯데 기업가치가 떨어지고 상장 흥행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호텔롯데 상장의 백지화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있다.
롯데와 신동빈 회장은 “호텔롯데 상장을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호텔롯데 상장은 롯데그룹 지배구조개선 차원에서 신 회장이 국민과 약속한 터여서 되돌리기 힘들다. 세계 1위 면세기업에 대한 롯데의 꿈도 여전하다. 롯데그룹은 “부족한 점을 보완해 세계 1위 면세기업으로 성장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면세점 실패의 책임을 물어 신동빈 회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것이라는 예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안으로는 가족 간 경영권 싸움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면세사업 경쟁을 치열하게 펼쳐야 하는 신동빈 회장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면세사업자 선정이 재계의 판도까지 바꾸는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