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이천수가 골을 성공시킨 뒤 환호하고 있다. | ||
이제 내가 힘들었던 시절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기이며 나는 언제나 그때를 추억하고 반성하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꾸려나갈 것이다.내가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집은 대단한 부자였다. 아버지는 대원전기라는 회사에 다니시면서 노조위원장을 맡고 계셨고 어머니는 잘나가는 보험설계사였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프셔서 드러누우셨다. 간병할 사람이 없어 결국 어머니가 직장을 그만두게 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아버지마저 직장을 잃고 말았다. 더욱이 아버지는 실직 후 늑막염에 걸려 2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셨다.
▲ 이천수의 고교시절 모습. | ||
그땐 내가 축구를 시작한 지 갓 1년이 넘었을 때였다. 축구화를 사주기는 하셨지만 축구를 시작한 지 한참 지나서야 살 수 있었기에 남이 신던 축구화를 신었던 적이 있었고, 스타킹도 남이 신다가 버린 찢어진 것을 주워다 신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축구부에서 합숙을 하면 합숙비도 내지 못해서 창피를 당한 적도 많이 있었다. 가끔씩 집에서는 ‘땡깡’을 부리기도 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오기를 부리며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후회가 되지만 어린 나이라서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안은 다시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올까 무서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도망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돈을 벌겠다고. 축구를 해서 꼭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 속 깊이 다짐했다.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나는 몹시 흔들렸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 진학보다는 프로구단 입단을 선택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안양으로부터 4억원이라는 거액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고 고려대에서도 입학 제의를 받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학교보다 돈을 택하겠습니다. 안양에 입단할게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시더니 단호한 어조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리집에 언제 돈이 있었느냐. 네가 대학을 포기하고 프로구단에 들어가서 받아온 돈을 이 아버지가 좋아라하고 받을 것 같니. 그 돈은 전부 네가 갖고 호적을 파서 우리 집에서 나가거라.”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기보다는 내 자신이, 그리고 가정형편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와 지방을 돌아다니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잠시 청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축구 마니아 한 명이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됐다.
당시 고려대 조민국 감독님은 그 기사만 보고 무조건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청주로 내려오셨다. 정말로 기적같이 감독님하고 청주 시내 한복판에서 마주쳤다.
“천수야, 나만 믿고 고대로 와라. 내가 너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 주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새로운 축구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히딩크…절망과 희망‘대표’가 되기까지
내가 두 번째로 힘든 시기를 겪었던 것은 바로 월드컵 대표팀 구성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당시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온 히딩크 감독님이 매 기수별로 선수들을 소집하고 해체하면서 나름대로의 테스트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 기수가 대략 1개월 정도였는데, 나는 처음 1기부터 8기까지 단 한 번도 소집을 받지 못했다. 그 8개월 동안 나는 근래에 겪지 못했던 가장 큰 아픔을 겪었고, 그 아픔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났었다.
물론 당시에는 습관성 어깨탈골로 인해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몸이 나은 후에도 소집령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는 단순히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전 국가대표였다. 테스트 한 번 해보지 않고 내 실력을 평가받았다는 사실은 거의 모욕에 가까웠다.나는 축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고 심지어 이민 가서 국적을 옮길 것까지 고민했다. 지금 돌아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다.
그때부터 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3개월 동안은 술만 먹으면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숙훈련에도 참가하지 않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기 일쑤였다. 내 인생에서 그토록 많이 술을 먹어보고 힘들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몸은 갈수록 둔해져갔다. 축구선수가 몸을 관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거의 축구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 하지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렇게 절망하고 포기하고 술을 마시는 것 밖에 없었다.
당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은규가 우리 집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들어오신 후 한탄하시면서 은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은규야, 우리 천수가 대표팀에 못 들어가는 게 이 아빠가 힘이 없어서 그런 가 보다. 내가 너무 돈이 없어서 그런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수를 꼭 대표팀에 넣고 말 거다. 이 아빠를 팔아서라도 천수를 대표팀에 넣을 거다.”
물론 아버지가 어떤 수를 쓰셨어도 내가 그것을 통해서 대표팀에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은규로부터 전해들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나를 대표팀에 넣고 싶어 하시는데 아들이란 놈은 이렇게 술만 먹고 절망만 하고 있었으니….
그 후 나는 마치 ‘외인구단’처럼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고 달리기도 열심히 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한 첫날, 나는 우리 집 뒤편에 있는 공동묘지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3개월 동안 몸을 돌보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친 운동을 하니 무리가 왔다. 나는 그만 빈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렇게 쓰러져서 3시간이 지난 후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자 점점 몸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더니 ‘다람쥐 이천수’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몸이 만들어졌다.
그 후 나는 자청해서 프랑스로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거기에서 나는 정말로 열심히 했고 또 잘했다. 프랑스에서의 테스트 실력이 양호한 탓인지 나는 드디어 히딩크호에 합류할 수 있었다.아마도 아버지의 말씀이 없었다면 나는 이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쓰디쓴 충고였고 나의 잘못된 생각을 통째로 바꾸고 흔들어 놓았던 중요한 조언이었다.
지금까지 두서 없이 월드컵에 대한 뒷 이야기와 내 지난날에 대한 편린들을 조금씩 꺼내 보았다. 더 많은 사연들이 남아 있지만 연재는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나머지 이야기는 얼마 전 출간된 나의 수기 <월드컵 뒷이야기>를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