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 문 대표 측의 ‘문안박’ 연대 제안에 대해 안 의원은 장고 끝에 거부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정계의 오랜 격언이 떠오르는 상황이다. 새정치민주연합 계파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4·29 재·보궐 선거 패배부터 비노계가 문 대표를 향해 제기한 ‘총선 지휘 불가론’이 연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동안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끝없는 사퇴 압박에도 불구하고 혁신안 카드로 돌파해 왔다. 그런 문 대표가 이번에는 문·안·박 연대를 제안하며 다시 한 번 사퇴 요구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지난 11월 20일 문 대표는 “지금 상황이 엄중하고 절박하다. 총선에서 박근혜 정권의 독재와 민생파탄을 견제할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역사에 죄 짓는 것”이라며 “문·안·박 연대는 전체 단합의 출발이 될 것이며 더 힘찬 혁신의 동력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29일 안철수 의원은 문 대표의 제안을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 개최’를 역제안 했다. 안 의원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상한 각오와 담대한 결단으로 다시 시작할 때다. 문 대표의 제안은 깊은 고뇌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문·안·박 연대만으로는 우리 당의 활로를 여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거부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안 의원은 “문 대표와 저를 포함한 모든 분이 참여하는 ‘혁신전당대회 개최’를 제안한다”며 “혁신전대를 통해 혁신의 구체적 내용과 정권교체의 비전을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 이를 통해 주류와 비주류의 반목과 계파패권주의도 함께 녹여내야 한다”고 새로운 제안을 내놨다. 사실상의 승부수다. 안 의원은 문 대표 지원을 위한 문·안·박 연대를 거절하고 조기 전대를 통해 지도부 자리를 두고 경쟁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제안을 거부하게 된 배경에는 문 대표의 말마따나 새정치연합 안팎으로 상황은 점점 엄중하고 절박해지는데도 비노계가 친노계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는 당내 분위기를 지적하는 의견이 많다. 내년 총선 야권 당선 의석수가 73석(지역구 61석+비례대표 12석)에 불과할 것이라는, 새정치연합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보고서가 공개됐지만 갈등의 골은 더 깊어가는 모양새다.
비노계 인사들은 문·안·박 연대도 친노 패권주의의 또 다른 결과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즉 안 의원을 희생해 다시 한 번 문 대표의 시간을 벌어주려고 한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비노계 한 의원은 “문 대표의 가장 큰 문제는 중대 사안을 언론에 발표하기 전 전혀 상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며 “일전에 비노계 한 중진 의원은 자신이 포함된 제안을 받은 적 있었는데 자신과 전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적 있다며 매우 불쾌해했다. 문 대표는 ‘하나로 힘을 모아야한다’, ‘일치단결해야한다’면서 미리 상의와 조율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모습은 친노계 입맛대로 하자는 친노 패권주의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이번 제안에 대해서도 안 의원은 약 10일간 답을 유보했다가 지나 결국 거절한 장면도 사전 조율이 부족했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일각에서는 안 의원이 결국 역제안을 하게 된 배경에는 최근 당내 초·재 의원들이 연달아 문·안·박 연대 촉구 성명을 낸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지난 11월 27일 초·재선 의원 48명은 “안 의원은 당을 위해, 나라를 위해 대승적 결정을 해달라”며 안 의원의 연대 참여를 촉구했다. 하지만 이들 상당수가 친노계인 한명숙 의원이 지휘한 지난 2012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의원이거나, 친노계로 분류되는 의원이라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문 대표가 낸 제안을 받으라고 사실상 친노계 의원들이 안 의원을 압박한 모양새였다.
더군다나 안 의원은 일종의 트라우마도 있다. 안 의원은 새정치연합이라는 독자적 정당을 창당하려다 지난해 3월 민주당과 함께 제3지대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고 김한길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하지만 약 4개월 만에 지난해 7월 재보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안 의원은 사실상 자신의 ‘혁신’이라는 이미지만 옛 민주당에 제공한 셈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문 대표는 재보선의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리만큼은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비주류안팎에서는 문 대표가 당내 계파청산, 구태척결 등을 목표로 출범시킨 혁신위에 대한 비판도 다시 나오고 있다. 문·안·박 연대 이전 문 대표가 당을 혁신하겠다며 내놓은 혁신위를 봐도 시간 끌기에 불과했고 바뀐 것도 없었다는 지적이다. 새정치연합 한 당직자는 “당초 혁신위가 언제까지 끝난다는 기한도 없었고, 혁신안이 몇 개 나온다는 이야기가 정해지지 않아 주목도도 떨어지고 시간 끌기라는 비판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7차, 8차 혁신안이 나오면서 나도 혁신안에 관심이 없어졌다”며 “당내에서 혁신안이 당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혁신안이 혁신적이지 않은데다 제도라는 것은 결국 운영하는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결과물만 보면 문 대표에게 면피할 구실이나 시간을 준 것 이외에는 큰 변화도 없었다는 지적에 일리가 없지 않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재보선 패배를 돌파하기 위해 패권주의 청산과 혁신을 하겠다고 만든 혁신위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대표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준) 혁신안은 친노에 유리하게 작용해 오히려 패권주의를 공고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따라서 문재인 대표는 먼저 지금까지 있어왔던 친노 패권주의를 인정하고 청산하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가 있다”며 “문 대표는 안철수 의원이 내놓은 역제안을 지분 요구로 볼 게 아니라 당이 거듭나 총선 승리로 가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국민에게 혁신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월쯤 조기 전당대회를 열고 문 대표, 안 의원, 김부겸 전 의원, 천정배 의원 등이 모두 나선다면 큰 흥행몰이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