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은 최형우 전 장관이 큰 충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오열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작은 사진은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 사진공동취재단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국회 최다선인 7선이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역시 5선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거물로 자리 잡은 이들 역시 YS의 상도동계 막내에서부터 정치를 시작했다. 상도동계는 과거 YS를 따르던 정치인들을 지칭한다. YS의 자택이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했기에 상도동계로 불렸다. 상도동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따르는 동교동계와 함께 정치파벌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김영삼 대통령이 등산을 하는 모습과 1992년 대선 유세 장면.
상도동계가 본격 형성되던 시기는 YS가 처음 대권 도전을 꿈꾸던 1971년 전후다. 이 당시 주축 멤버는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고 김동영 전 정무장관, 고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 김덕룡 전 정무장관으로, 지금까지 ‘상도동계 원조 4인방’으로 불리고 있다. 26일 거행된 영결식에는 상도동계를 대표하는 최형우 전 장관, 김덕룡 전 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장례위원회 위원으로 참석했다. 고 김동영 전 장관의 부인과 고 서석재 전 장관의 부인 역시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 최형우 전 장관
‘우형우’라 불렸던 최 전 장관은 실제로 오른팔로서의 측근이기보다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 정치적 동지에 가까웠다. 최 전 장관은 YS와 식사 도중 밥상을 발로 차 엎어버리며 “그 딴 식으로 하면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안 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일화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1972년 9월 이른바 진산파동으로 불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가 유진산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최 전 장관은 ‘YS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가신이었다.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가 최 전 장관을 연행해 고문했지만 이에 끝까지 저항했고 당기위원장과 정무위원장 사퇴를 압박했을 때도 버텼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보사부 장관이나 건설부 장관을 맡으라’고 회유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 김종필 최고위원(JP)이 YS 지지를 유보하자 JP 자택을 찾아가 YS를 한 번 만나보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내무부 장관을 맡아 ‘부패세력 척결’을 외치며 기득권 세력과 단호히 투쟁했다.
# 고 김동영 전 장관
국회 전문위원이었던 김 전 장관은 4선 의원을 지냈으며, 신민당·민주당 원내총무,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불곰’이라는 별명처럼 YS의 뜻을 우직한 곰처럼 수행했던 그는 말기 암 환자였음에도 투병 사실을 숨긴 채 YS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정치인들과의 폭탄주를 불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 당시 서동권 안기부장과의 술자리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김 전 장관은 서 부장을 YS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를 한 다음날 새벽, 김 전 장관은 전날 과음을 하고도 YS의 출장길에 배웅을 나왔다. 서 부장은 당시 김 전 장관이 암투병 중임에도 과음을 한 충성심에 마음이 움직여 YS 대통령 만들기에 동참하게 됐다고 한다. YS는 김 전 장관의 빈소에서 자신의 분신이 사라졌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 고 서석재 전 정관
서 전 장관의 대학 후배로 그의 보좌관을 지낸 이종혁 전 의원은 “서 선배는 4·19 혁명 세대였는데 이때의 리더십이 YS 귀에 들어가 발탁됐다”며 “통일민주당 창당과 3당 합당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등 40년 이상 YS 조직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해 상도동계 내에선 조직의 귀재로 통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전 의원은 “서 선배는 YS의 그림자도 안 밟겠다고 말할 정도로 높은 충성심을 갖고 일했고 YS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곁을 지키며 목숨을 걸고 모셨던 가신”이라며 “요즘 공천특위로 불리는 조직강화특위 위원장을 늘 맡았는데 이것이 YS의 신임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YS는 누군가 조직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석재한테 물어봤나”라며 무조건적으로 서 전 장관을 신뢰했다고 한다.
맹활약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만큼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1989년 강원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후보 매수 사건에 연루돼 검찰에 구속 기소된 것이다. YS의 대통령 당선 이후 대법원 확정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정치적 고초도 겪었지만 YS는 1994년 12월 그를 총무처 장관에 임명해 굳건한 ‘신뢰’를 보였다.
총무처 장관 재직 때인 1995년 그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비자금 문제를 처음으로 공개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원 비자금 설을 주장해 8개월여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신한국당을 탈당했고, 이후 국민신당 최고위원과 국민회의 부총재, 국민통합21 상임고문 등을 지냈고 2009년 별세했다.
# 김덕룡 민추협 이사장
김 이사장은 1970년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상도동계 실권을 장악했다. 대학생 때와 정치입문 후 민주화 운동으로 네 차례나 투옥됐다. 이 중 한 번은 전두환 정권 당시 ‘YS의 23일 단식투쟁’을 외부에 알리려다 긴급조치로 투옥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집에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매일 아빠가 안보이니까 해외 출장을 갔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출소 후에 장난감을 사들고 간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후 민주산악회를 결성하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하고, ‘2·12 선거혁명’, 대통령 직선제 쟁취, 3당 합당, 문민정부 창출 등 한국사의 정치구도를 바꾸는 큰 흐름 속에서 그는 YS와 늘 함께했다. 김 이사장은 대체적으로 저돌적이었던 상도동계 인사들과 달리 뛰어난 지략과 논리력을 높게 평가받는다.
김 이사장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동물적 감각을 가진 승부사로서의 YS보다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정확함을 손꼽아 회고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부친께 안부전화를 드릴 정도로 효심이 지극한 분이셨다. 아버지의 재혼을 권하셨고 새어머니 분께도 지극히 잘했던 것이 기억난다”며 “비서 한 명 한 명의 건강도 손수 챙길 정도로 따뜻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임기 말 아들 현철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있었을 당시에도 혐의가 입증되기 전부터 검찰총장에 전화해 ‘빨리 잡아가라’고 할 정도로 엄격한 면도 있었다”고 전했다. 김 이사장은 언론에 기고한 추도사에서 이렇게 애도했다.
“1963년 대학교 선배님으로 처음 뵙고 1971년 홀로 전국의 시장과 학교를 돌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지원 유세를 하는 것을 보고 비서로 입문해 모시고 배운 지 어언 반 백 년이 가깝습니다. 이제 김영삼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면서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득한 심사와 함께 대통령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태산 같은 걱정이 앞을 가립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 불퇴전의 용기와 대도무문의 정신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고자 마음을 다 잡고 있습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