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10분께, 조용하던 한 아파트가 소란스러워졌다. 한 남성이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 그는 초인종도 수차례 누르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집 안에 있던 여성은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문을 열면 다음 상황은 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은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녹음기를 켜고, 문을 열었다. 남성은 여성을 보자마자 발로 걷어차고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광주에 위치한 조선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의전대) 3학년생인 피해자 이 아무개 씨(여·31)는 지난해부터 같은 학년 동기인 박 아무개 씨(33)와 교제를 시작했다. 교제 초반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갈등은 없었다. 그런데 석 달가량이 지난 뒤부터 박 씨의 폭력이 시작됐다. 폭언·폭설 등 언어폭력이 먼저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다 결국 신체적 폭행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던 지난 3월 28일, 문제의 사건이 터졌다. 새벽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씨에게 전화를 한 박 씨. 전화를 끊은 그는 돌연 여자친구의 집에 들이닥쳤다. “문을 열라”며 현관문을 두드렸고, 초인종을 수차례 눌렀다. 겁에 질린 이 씨가 문을 열자, 폭행이 시작됐다.
당시의 상황은 이 씨가 녹음한 파일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앞서 박 씨는 이날 이외에도 이 씨를 두 차례 폭행했는데, 이 씨가 사과를 요구하면 그때마다 박 씨는 “내가 언제 때렸느냐. 증거 있느냐”라며 반박했다. 이 씨는 박 씨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도록 이날 녹음기를 켜둔 채 문을 열었던 것이다.
SBS가 공개한 해당 녹취에 따르면 박 씨가 여자친구 이 씨를 폭행하기 시작한 이유는 ‘말투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었다. 녹음된 박 씨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왜 재수 없게 말해? ‘나는 잔다’ 이렇게 말했지?” “(전화를) 싸가지 없게 했어 그러면? 왜 그랬어?”였다. 이 씨가 “잠자다가 받아서 그랬어 ‘잘 자’라고 대답했어”라고 말하자 박 씨는 화를 내며 이 씨를 폭행했다.
박 씨는 이 씨의 허리와 복부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이후 “열 셀 때까지 일어나라”며 계속 폭행을 했다. 숫자를 하나씩 세어가며 “허리가 아파 못 일어난다”고 하면 못 일어난다고 발로 걷어찼고, 일어나면 뺨을 때렸다. 이 사건의 1심 재판의 판결문을 보면, 해당 상황은 이렇다.
“박 씨는 이 씨의 뺨을 꼬집고 손바닥으로 뺨을 수차례 때렸다. 이 씨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발로 피해자의 옆구리, 가슴, 다리 등을 수차례 걷어찼다. 또 소파에 밀쳐 목을 조르고, 이 씨가 방으로 피신해 경찰에 신고하자 따라 들어와 전화기를 빼앗은 후 다시 이 씨를 밀쳐 바닥에 넘어뜨리고 양손으로 목을 조르는 등 무차별 폭행했다. 이로 인해 박 씨는 이 씨에게 약 3주간의 치료를 요하는 우측 늑골 골절 등의 상해를 가했다.”
여기에 박 씨는 폭행 도중 이 씨의 휴대전화 SNS메신저와 문자 메시지를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가운데 마음에 안 드는 문자를 발견하고 또 다시 폭행이 시작됐다. 이 씨가 다른 학생과 주고받은 문자였는데 “어디냐”라고 묻는 문자에 답을 한 것에 대해 박 씨는 “왜 네가 대답하느냐”며 폭행을 이어갔다. 할 말이 없던 이 씨는 ‘문자가 온 걸 봐서 답을 했다’라는 취지로 답을 하는데, 박 씨는 ‘친목질’이라며 발로 걷어찼다.
수시간에 걸쳐 폭행을 당하던 이 씨는 중간에 틈을 타서 집밖으로 도망을 갔다. 아파트 복도로 뛰쳐나가 다급하게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사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뒤따라 나온 박 씨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다시 끌려 들어왔다. 이 씨는 도망친 이유로 또 다시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이때 흥분한 여성의 애완견이 박 씨의 발을 물었는데, 그는 강아지의 눈에 혈관이 모두 터질 때까지 목을 조르기도 했다. 녹음 파일에는 “강아지를 죽이지 말라”며 애원하며 비는 이 씨의 목소리 역시 고스란히 들어있다. 박 씨의 폭력은 동이 틀 무렵 그가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이어졌다. 박 씨가 잠깐 잠이 들자, 이 씨는 방에 몰래 들어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 씨가 경찰에 ‘살려달라’고 말하는 순간 박 씨가 들이닥쳐 휴대전화를 빼앗겼다. 경찰이 이 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통해 아파트 위치를 추적해 찾아올 때까지 폭행은 계속 됐다. 지난 3월 29일 오전 8시, 약 4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악몽 같은 시간이 끝났다.
하지만 이 씨의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됐다. 박 씨는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순간까지 경찰에게 이 씨가 다친 게 아니라 본인이 다쳤다며 이 씨가 ‘쇼’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 것. 박 씨는 사건이 검찰로 송치됐을 때도 “이 씨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쌍방 폭행으로 맞고소를 했다. 폭행 당시 박 씨가 이 씨의 이를 뽑겠다며 입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이 씨가 깨물면서 상처가 났던 점, 도망가는 이 씨를 붙잡는 과정에서 갈비뼈에 금이 갔다는 점을 두고 “폭행당했다”고 주장했다.
박 씨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정당방위’가 인정이 돼 즉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학교에서는 “이 씨도 폭행을 했으며, 그로 인해 처벌까지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는 “조사 결과 피해자 이 씨는 폭행당한 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저항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 씨의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씨 스스로 휴학을 하려고 생각하던 차에 또 다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의전원 내에 “이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 경찰 조사에서 이 씨는 “가해 남성 박 씨가 학교에서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여자가 때리게끔 유도해 어쩔 수 없었다거나 폭행 내용 역시 거짓말이라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주장했다.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에게 쌍욕을 해 논란이 된 조선대 대학원생 동기들의 카카오톡 대화 캡처.
오히려 박 씨는 검찰 수사가 진행 중, 또 다른 여성을 폭행했다. 지난 6월 클럽에 들렀던 박 씨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20대 여성에 대해 “의사를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며 바닥에 넘어뜨리고 휴대전화를 빼앗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결국 박 씨는 이 씨를 4시간 반 동안 폭행한 혐의와 클럽에서 만난 전혀 모르는 20대 여성을 폭행한 두 건의 폭행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박 씨에 대해 징역 2년을 구형했다.
형법상 상해죄의 법정형은 7년 이하 징역, 10년 이하 자격정지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이다. 일반상해의 경우 법원 양형기준은 징역 2개월~2년에 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0월, 1심 재판부는 “폭행이 2시간 이상 계속돼 죄질이 좋지 않다”면서도 징역형 대신 벌금형을 택했다. 박 씨가 지난 6월 다른 여성 A 씨를 폭행한 혐의(피해자와 합의)가 더해져 벌금 1200만 원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벌금형을 택한 이유로 6가지를 들었다. △박 씨가 반성하고 있다 △음주운전 1회 외엔 전과가 없다. △다른 피해자인 20대 여성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 △이 씨의 상해 정도가 중하지 않다. △박 씨가 이 씨를 위해 500만 원을 공탁했다. △집행유예 이상 형을 받으면 학교에서 제적될 위험이 있다. 박 씨는 앞서와 같은 법원의 판단대로, 아무런 제지 없이 학교를 다녔다.
지난달 30일, 이번 사건이 보도되고 나서야 학교는 박 씨의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사건이 벌어진 뒤 약 9개월, 1심 판결이 나온 뒤 50여 일이 지나 나온 조치다. 그리고 학교는 지난 1일 “박 씨를 제적 조치한다”고 밝혔다. 학교 측은 박 씨에 대해 “학생 간 폭행으로 상해를 입힌 학생은 제적할 수 있다”는 학칙을 징계의 근거로 들었다. 학칙까지 버젓이 있었는데도 이 씨가 수개월 동안 하소연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제적이, 여론이 들끓자 단 이틀 만에 수용됐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지난 2일 조선대 의전대에 대한 실태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보고 내용에 왜곡이 있을 경우 “강력한 후속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까지 한 상태다.
현재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형량이 낮다며 항소를 했고, 이에 맞서 박 씨도 벌금이 너무 많다고 항소를 했다. 또한 이 씨가 박 씨에 대해 추가로 고소한 감금·협박 혐의도 2심 재판에서 다뤄질 예정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