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딩크가 6월22일 스페인전에서 승리한 후 관중 에게 한국식으로 인사하는 모습. 특별취재단 | ||
그런 가운데 영국의 최대 공영방송인 BBC는 1일(한국시간) “히딩크 한국 대표팀 감독이 네덜란드 PSV아인트호벤 감독으로 가기로 확정했다”고 보도했다. 히딩크 감독은 5일 한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도착한 뒤 아인트호벤과 정식계약을 맺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히딩크 감독은 지난 6월30일 도쿄에서 가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과의 면담에서 한국 잔류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정 회장은 히딩크 감독에게 간곡히 한국에 남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끝내 거부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월드컵 직후 유럽팀 감독으로 이적하겠다는 히딩크 감독의 마음에 약간의 동요가 일고 있다”고 전하면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의장의 강한 부탁과 설득이 그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1일 현재 히딩크 감독의 거취문제는 여전히 안개정국을 이루고 있다.
월드컵 개막 직전 히딩크 감독이 고향팀인 PSV아인트호벤을 맡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인트 호벤에서도 히딩크 감독과의 접촉을 시인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냈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처음에 아인트호벤과의 접촉을 부인하면서 “월드컵 기간엔 월드컵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말로 교묘히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아인트호벤에서는 라이 구단주까지 나서서 히딩크 감독 영입설을 기정사실화했고 월드컵 직후 사인만 남아있을 뿐이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나 지난 29일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여전히 또다른 가능성을 시사했다. 아인트호벤이 감독직을 제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인은 자신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여운을 뒀다.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뒤 믹스트 존(공동취재구역)에 나타난 히딩크 감독은 향후 거취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내외신 기자들의 거센 요구에 부닥쳤다. 그는 또 한 번의 말솜씨를 자랑했다.
“내 꿈은 날마다 선수들과 잔디밭에서 뒹굴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다. (사회자가 클럽팀을 말하는 것이냐고 묻자) 물론 클럽일 수도 있다. 나에게 한국은 오래도록 함께 한 클럽팀과도 같은 팀이다.”
이전의 대답과 약간 다른 양상을 띠는 것이라면 한국에 대한 미련을 조금은 내비치고 있다는 사실. “한국에 남을 생각이 있느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해 “한국에 남는 것도 가능하다. 지난 1년6개월간의 경험을 원한다면 어디든 가서 기여하고 싶다. 한국 축구의 미래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며 처음으로 한국 잔류 가능성에 여지를 남겼다.
믹스트 존에 있던 기자들은 히딩크 감독의 언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질문이 꽤 집요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피해가며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도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것.
▲ 히딩크는 정몽준 회장의 재계약 프러포즈를 과 연 받아들일까? | ||
그렇다면 월드컵 직후 한국과는 영원히 작별을 고할 것으로 예상됐던 히딩크 감독이 왜 조금씩 동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첫째,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룬 뒤 구체화된 국민여론은 물론 정몽준 회장의 보다 현실적인 프러포즈가 히딩크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지난 24일 독일과의 준결승이 벌어지던 날, 정 회장은 대표팀 숙소인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을 직접 찾아가 히딩크 감독에게 재계약을 완곡히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정 회장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이후 자신의 거취를 공식적으로 밝힐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부터 조금씩 한국 잔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둘째, 한국의 조건없는 전폭적 지원과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했다는 얘기도 설득력이 있다. 그동안 히딩크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 등 유럽 명문팀을 지도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재임 기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6개월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오래 버틴 것이라고 한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어떤 팀에서도 계약 후 1년 안에 성적을 올리지 못할 경우 파리 목숨처럼 단번에 감독 교체를 단행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목표를 향해 나가는 지도자에게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관대함과 배려를 경험했다. 물론 한동안은 자신의 사생활을 둘러싼 여론과의 힘겨루기가 그를 힘들게 했지만 적응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더구나 선수들은 순수한 열정과 성실한 자세로 감독의 모든 훈련을 순순히 따라주었고 게임에서도 기대 이상으로 혼신을 다해 잘 뛰어준 데 대해 히딩크 자신도 감동받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
만약 정 회장이 유럽 명문팀 대신 한국에 남기로 결정한 히딩크 감독에게 그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장기계약, 은퇴 후의 노후보장까지 약속한다면 그는 잠시 외유를 즐긴 후 다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 있다.
셋째, 연인 엘리자베스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가 월드컵 동안에 상당히 부드럽게 바뀌었다는 점도 변수다. 히딩크가 한국과의 인연을 지속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문제가 월드컵에서 대업을 달성하면서 백팔십도로 달라졌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엘리자베스의 격려와 응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서 아예 우호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있다고 해서 히딩크가 하루아침에 한국 잔류로 마음을 굳히리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아인트호벤행이 확정됐다는 BBC의 보도에도 불구하고 히딩크 감독의 거취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미로에 갇힌 것처럼 뿌옇기만 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과의 인연은 언제까지나 지속하겠다는 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