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왼쪽은 이운재, 김태영, 아래는 송종국(왼쪽), 유상철 | ||
믿기 힘든 ‘괴력’을 발휘한 이들은 불과 1년6개월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그저 그런 선수였다. 개중에는 축구팬들 조차 잘 알지 못하는 무명의 선수도 있었다. 또 이들 가운데는 폐결핵을 앓은 사람도, 웨이터로 일한 사람도, 가난이 지긋지긋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실업팀과 프로팀을 전전한 사람도 있었다. 자칫 숨은 재주가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질 뻔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 태극전사들이 이룩한 인생 대역전극의 월드컵 드라마는 더욱 진한 감동을 준다.
[이운재]
2002한일월드컵을 통해 한국의 간판 수문장으로 자리를 굳힌 이운재는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선수. 그는 그동안 김병지와 후배 김용대 선수에 밀려 벤치를 지키곤 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94년 미국 월드컵 때. 당시 경희대 3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독일전 후반에 깜짝 투입되면서 ‘차세대 수문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2년 뒤 폐결핵을 앓으며 선수생명이 끝날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뒤 이운재는 부인 김현주씨와 굳은 약속을 했다. 반드시 재기해 이번 월드컵에서 주전 자리를 꿰차겠다고.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보란 듯이 지켜냈다.
[김태영]
그의 축구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70년 전남 고흥 출신인 그는 고흥초등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지만, 중학교 진학 때 축구를 포기할 뻔했다. 축구선수로 뛰던 형들이 고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부모님이 만류한 때문.
어렵게 다시 축구를 시작, 고교에 진학했지만 그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김태영은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을 찼다. 감독도 열성에 탄복해 1학년 후반에 출장기회를 줬다. 이후 김태영은 고기가 물 만난 듯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는 지난 93년 축구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는 활약했지만 정작 본선 엔트리에서 빠진 것. 축구협회 주변에서는 그가 탈락한 이유는 대표선수 가운데 유일한 실업선수(국민은행)였기 때문이란 얘기가 나돌았다. 당시 김태영의 부친은 한쪽 귀에 보청기를 껴야 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송종국]
‘제2의 홍명보’ ‘히딩크호의 신데렐라’로 불리는 송종국은 이번 월드컵 이후가 더욱 기대되는 신예. 지난해 2월 UAE 두바이에서 열린 모로코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후 30경기를 연속해 출장했다. 이후 중앙수비는 물론 공수전환의 중추적인 구실까지 도맡아 대표팀의 키플레이어로 발돋움했다.
송종국이 이처럼 연속해서 A매치에 출전한 것은 유상철과 같은 멀티 플레이어이기 때문. 강철같은 체력에 순간 스피드는 포르투갈의 피구보다 낫다는 네티즌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79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한 그는 명원초등교 축구부에서 축구를 처음 시작했다. 이후 재능을 인정받아 서울 배재중-고를 거쳐 지난해 연세대를 졸업, 프로팀 부산 아이콘스에 입단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기독교적인 절제된 사생활로 선후배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여성적으로 보일 만큼 섬세하고 차분한 성격이지만 일단 공을 잡으면 성난 야수로 바뀐다. 준수한 용모 탓에 여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는 앞날을 약속한 애인이 있다고.
[유상철]
한 방이 필요할 때 골을 터트리는 선수가 바로 유상철이다. 그는 지난 98년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한 골을 넣어 실의에 빠진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스위퍼에서 수비형, 공격형 미들필더, 포워드까지 어느 자리를 맡겨도 감독들에게 안심을 주는 전천후 멀티 플레이어다.
그가 축구를 시작한 것은 서울 응암초등학교 4학년. 잔병치레가 많아 건강을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까지 키가 작아 졸업할 때까지 반에서도 10번을 넘지 못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땅꼬마. 이런 유상철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경신고에 입학하면서부터. 1년 새 키가 무려 20cm나 자라 지금의 당당한 체격(184cm, 78kg)을 갖추게 됐다.
건국대 감독을 지낸 정종덕씨는 “유상철이 뛰면 묘하게 경기 흐름이 바뀐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해결사로서 맹활약했다. 대표팀에서 얻은 별명은 ‘유비’. 조용조용한 말투와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 그러나 일단 찬스가 생기면 범처럼 달려드는 투지로 상대팀 감독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다.
▲ 위 왼쪽은 김남일, 설기현, 아래는 홍명보(왼쪽), 이영표 | ||
터프한 경기스타일 못잖은 거친 말투와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김남일은 여성팬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의 터프함 뒤에는 숨길 수 없는 과거가 있으니 바로 고등학교 시절의 가출 사건.
부친 김제기씨(55)는 “걔는 원래 내성적이고 온화한 성격”이라며 “고교시절의 가출사건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웃음을 지었다. 김남일은 부평고 축구부 주장을 맡으면서 선수들의 집단 탈퇴를 주도했다. 나중에 동료들이 학교로 모두 돌아가자 8개월 동안 혼자 유흥업소에서 웨이터를 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그를 찾은 곳은 부평시내의 한 허름한 여관.
당시 부모를 만난 김남일은 “죄송하다”면서도 “축구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버텼다. 막내아들을 설득하다 지친 부친은 결국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너를 아끼는 감독, 코치분께 인사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남일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학교를 찾았고, 김남일을 다시 만난 코치 조종구씨(현 재현고 축구부 감독)는 “내일부터 다시 밟아라”고 당부했다. 조 코치의 이 말에 그동안 고집을 부리던 김남일은 어쩐 일인지 마음을 돌렸단다.
[설기현]
패색이 짙던 이탈리아전 후반 43분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8강 진출에 견인차 역할을 한 히어로 설기현.
그가 히딩크 사단의 선두주자로 성장하기까지 모친 김영자씨의 아들사랑이 절대적이었다. 탄광 광부로 일하던 그의 부친은 여덟 살 때 사고로 작고했다. 결국 모친은 올망졸망한 4형제를 데리고 태백에서 강릉으로 이사했고, 과일가게를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었다.
설기현은 자식을 키우기 위해 고생하는 모친에게 ‘돈’을 드리고 싶어서 광운대 재학시절 프로리그로 진출했다. 벨기에 프로리그에 진출해 번 돈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이 모친에게 아파트를 선물로 사줄 만큼 그는 효자다.
어머니에 대해 늘 애틋한 마음을 가진 설기현은 어머니 때문에 월드컵 기간 중 또 한번 눈물을 흘렸다. 평소 양쪽 무릎 관절염을 앓았던 어머니가 16강전을 앞두고, 강릉 인근의 한 사찰에서 1천배 기도를 올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때문. 지칠 줄 모르는 설기현의 공격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 모양이다. 그의 또다른 소망은 월드컵이 끝난 뒤 현재 혼인신고를 한 부인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란다.
[이영표]
지난 99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코리아컵대회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단 이후로 지난 3년간 한 번의 낙오없이 대표팀을 지켜온 이영표. 이런 그를 채찍질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큰형이다. 2남 1녀 중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난 이영표는 큰형 이태호씨(42)와 무려 16살 차이가 난다.
모친 박정순씨(64)는 “영표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가 강원도 홍천에서 농사를 짓느라 무척 바빴다”며 “영표가 형들과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99년 코리아컵이 끝난 후 이영표가 ‘깜짝 스타’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혼란기를 맞자, 형 이씨는 “여기서 만족할 거냐”며 호되게 나무랐다고 한다. ‘아버지 같은’ 큰형의 호된 꾸짖음에 이영표는 다시 축구화 끈을 졸라맸다.
[홍명보]
대표팀 맏형 홍명보는 인간적인 면에서도 대표선수들 사이에 존경을 받는다. 일본 J리그 벨마레 소속 시절 외국선수로 유례 없이 주장을 지냈고, 가시와 레이솔에서는 구단주가 직접 나서 지도자 자리를 제의하며 한국 복귀를 만류할 정도였다.
그런 그도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리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다. 또래에 비해 체격이 왜소한 편이었고, 수비수라는 포지션이 각광을 받았던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 그러다 고려대 4학년이던 지난 90년 대표팀에 발탁됐고 이탈리아 월드컵 1라운드 세 경기를 모두 뛰며 스타로 발돋움했다.
94년 미국 월드컵을 거쳐 98년 월드컵까지 출전했지만 네덜란드에 5 대 0으로 대패한 데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차범근 감독마저 도중 하차해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어 보였다. 히딩크 감독은 수비전술 운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지난해 한동안 그를 대표팀에서 제외했고 올해 초엔 왼쪽 정강이 피로골절로 월드컵은 물론 선수생명이 끝날 위기를 맞기도 했다.
프로축구 사상 신인으로 유일하게 최우수선수 등극(92년), 국내 최초의 연봉 1억원 돌파, 국내선수 중 A매치 최다출전(1백27회-이번 월드컵 경기 제외), 국제축구연맹 선수위원 등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 위 왼쪽은 안정환, 이천수, 아래는 최진철(왼쪽), 박지성 | ||
탤런트 뺨치는 빼어난 외모로 여성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안정환의 파워는 ‘여성’들에게서 나온다. 안정환의 기억속에 있는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 아내(이혜원씨), 그리고 장모가 그의 힘이 되어주는 사람.
실제로 안정환은 결혼 이후 한결 플레이가 안정적이고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안정환이 아내 이혜원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혜원의 집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딸이 평범한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랐던 이혜원씨의 어머니는 “안정환과 헤어지게 해달라며 금식기도까지 했다”는 것.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 안정환의 장모는 지금은 누구보다 사위사랑이 ‘장난이 아니다’. 안정환은 어머니 못지 않는 사랑을 장모로부터 듬뿍 받고 있다고.
[이천수]
대표팀 선수 중 가장 밝은 모습의 이천수. 그는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에도 긴장하지 않는 여유로움을 보여, 도무지 힘든 시절이라고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천수가 나중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어린이들을 위한 축구교실을 차리는 것’이란다. 그 이유는 어린 시절에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기억 때문. 이천수가 기억하는 유년시절은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셨고, 어머니가 보험설계사를 하며 식구들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을 많이 겪었다는 것.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형이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이천수는 자신도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이천수의 유일한 꿈을 축구선수. 그저 공을 차는 것이 즐거웠던 이천수는 축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왜소한 체격조건(172cm, 65kg)을 뛰어넘기 위해 이천수는 부평동중-부평고등학교 시절 훈련밖에 몰랐다고 한다.
[최진철]
한국-이탈리아의 8강전을 끝내고 링거를 맞을 정도로 탈진했던 최진철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가 발표하기전까지 누구보다도 가슴을 졸였던 선수.
그는 월드컵과는 지독히도 인연이 없었다.미국 월드컵을 앞둔 93년에는 훈련 중 발목이 돌아가 아예 뛸 수조차 없었고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97년에는 브라질과의 평가전 경기 종료 3분전에 교체 투입된 후 속절없이 태극 마크를 반납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프로경기를 마치고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받은 대표팀 합류 통보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올해 31세인 그로서는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 기회일 가능성이 높지만, 과거의 기억 때문에 대표팀 발탁 소식에 걱정부터 앞섰던 것. 그러나 그는 히딩크의 시험을 통과하는 ‘작은 기적’을 일으키는 뒷심을 발휘했다.
히딩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뛰고 있는 심재원을 두 차례나 불러들여 경합을 붙였지만, 그는 스리백(김태영-홍명보-최진철)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주전경쟁에서 밀리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최진철이 제주서초등-중앙중-오현고를 거치는 동안 골잡이로 활약했다는 점. 숭실대에 입학하면서 수비수로 위치를 바꿨고 현 소속팀 전북 현대에서도 수비를 맡고 있지만 지난 98년과 99시즌에는 깜짝 스트라이커로 변신, 17골을 터트리며 간판 골잡이 몫을 톡톡히 해냈다.
[박지성]
포르투갈전에서 역사적인 16강행 축포를 쏘고, 곧장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포옹했던 귀염둥이 박지성. 히딩크 감독에게 어리광 부리는 모습으로 비춰졌던 박지성은 집에서도 귀여움을 한몸에 받는 외동아들.
경제적으로 풍족치 못했던 박지성의 부모가 아들을 하나만 둔 이유는 다름 아닌 좋은 축구선수로 키우고 싶어서란다. 부친 박성종씨와 모친 장병자씨는 “축구가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은 아니지만, 우리 형편에서 마음 놓고 시킬 수 있는 운동도 아니었다”고. 때문에 박 선수의 부모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소질이 있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서 하나라도 잘 키우자는 심정으로 더이상 자식을 낳지 않기로 했다는 것.
말솜씨가 좋아 축구 국가대표 선수 가족 인터뷰의 단골인 박지성의 부모는 틈만 나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들 자랑하기에 바쁘다. 명지대에 휴학 중인 올해 21세의 약관 박지성은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 선수 중 가장 인기가 높아 대회가 끝나면 여성팬들의 쇄도하는 데이트 신청으로 몸살깨나 앓을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