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경기도 이천에서 발생한 공기총 살인사건의 주범 김 아무개 씨가 지난 3일 김포공항을 통해 송환되고 있다. 김 씨는 B 씨와 공모해 조직폭력배 행동대원 A 씨를 공기총으로 쏴 숨지게 한 뒤 인근 모래밭에 시신을 암매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또 누가 몰래 소를 잡았나 보군…. 양심도 없지.” 당시 해당 지역에서는 늦은 밤 소 또는 돼지와 같은 가축을 도축해 몰래 고기를 구워 먹고 남은 부위와 내장 등을 땅에 묻어 놓고 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앞서의 주민은 “또 옆 동네 누군가가 여기까지 와서 어질러 놨다”라고 투덜거리며 핏자국이 있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땅 속에서 그가 본 것은 가축이 아닌, 사람의 발이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확인한 사체의 모습은 참혹했다. 후두부에만 5개의 총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머리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신원 확인 결과, 피해자는 살인과 강도 등의 혐의로 지명수배 중이던 성남지역 조직폭력배 ‘국제마피아파’ 행동대원 A 씨(당시 22)였다. 당시 잠적해 있던 그가 사체로 발견되자, 경찰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조직 간 다툼이나 원한, 채무 관계 등 짐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특정됐다. 당시 A 씨가 투숙하던 여관에서 김 아무개 씨(55·당시 30)의 일기를 발견하고 결정적인 주변인 증언도 확보한 것. 경찰은 A 씨가 그 즈음 김 씨, B 씨(48·당시 23) 등과 어울려 다녔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B 씨는 김 씨의 심부름 등을 도맡았던 인물이었다.
특히 지난 1990년 5월 7일 오전 10시께 “김 씨와 B 씨가 함께 있었다” “같은 날 오후 A 씨가 이들과 함께 있었다” 등의 증언이 확보됐다. 이후 A 씨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들에 대한 추적에 나섰으나, 이미 둘은 종적을 감춘 뒤였다.
김 씨와 B 씨가 사라진 동안 경찰 수사는 답보 상태였다. 이들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 그런데 지난 1990년 8월 30일, B 씨가 서울 강북에서 특수절도 혐의로 검거되면서 사건이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B 씨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살인 혐의 대신, 차량 등의 절도 혐의로 수배가 돼 있던 상태였다. A 씨가 사체로 발견됐을 때부터 B 씨를 쫓고 있던 이천경찰서는 신병인수를 받아 수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찰 조사 과정 중 가장 첫 번째 절차인 자필 조사 과정에서 B 씨는 A 씨와 관련된 사건 혐의를 진술하게 된다. 당시 경찰은 A 씨 살인 사건에 대한 정보나 살인 혐의에 대한 설명을 B 씨에게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진술을 한 것. B 씨는 해당 진술서에서 “사건 발생 당시 앞서의 김 씨와 A 씨를 제외하고 두 명이 더 있었다” “살인은 하지 않았다” 등의 진술을 했지만 주변인 증언과 경찰 조사 내용 등을 통해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사안은 당시 B 씨가 일하던 주유소에서 발생한 강도 사건이다. 당시 B 씨에게 “밤에 종업원들이 잔다. 돈을 훔치기 쉽다”는 말을 들은 A 씨가 낫을 들고 종업원을 위협해서 다치게 만드는 강도상해 사건을 일으킨 것. 이 과정에서 A 씨는 B 씨에게 “우리는 공범이다. 내가 잘못되면 똑같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과 공갈을 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사건 발생 당시 행적과 주변인 진술, 범행 동기 등이 속속 드러나고 경찰의 추궁이 계속되자, 결국 B 씨는 범행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B 씨는 경찰에 “A 씨를 죽인 것은 맞지만 내가 하지 않았다. 범행을 계획한 것도, 총을 쏜 것도 모두 김 씨가 했다”고 진술한 것.
그의 자백에 따르면 앞서의 김 씨는 유흥업소 댄서나 가수 등을 자신의 집에 합숙시키며 업소에 보내는 일명 ‘보도방’을 운영해왔다. 여기에 전문적으로 차량 절도를 했으며 훔친 차량과 동일한 차종의 번호판을 위조해 ‘쌍둥이차’를 만들기도 했다.
김 씨와 A 씨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쌍둥이차 때문이었다. 당시 수배돼 있던 A 씨는 정상적인 경로로 차를 구매할 수 없어 김 씨에게 차를 구입하기로 한 것. 그런데 A 씨는 차량 대금 150만 원 중 120만 원만 주고 나머지 대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A 씨는 “나머지 30만 원을 달라”는 김 씨에게 자신이 폭력 조직의 행동대원임을 부각하며 “이 차도 장물 아니냐. 돈을 더 주지 않았다고 해서 어떻게 할 거냐”고 협박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김 씨는 지난 1990년 4월 20일 이천시 장호원읍의 한 총포사에서 공기총을 구입한다. 돈은 자신이 지불하면서도 B 씨 명의로 구입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같은 해 5월 5일과 6일에는 내연녀와 B 씨 가족들을 데리고 A 씨의 사체가 발견된 범행 현장 사전 답사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리고 사건 당일인 지난 1990년 5월 7일, 김 씨는 B 씨와 함께 A 씨를 불러 “장호원읍에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같이 가서 회를 먹고 오자”고 제안한다. 같은 날 오후 9시께, 회 대신 고기를 먹기로 한 세 사람은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고기와 불판, 숯을 사와 자리를 마련했다. 한창 고기를 먹던 중 김 씨는 “잠시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오겠다”며 A 씨와 B 씨를 남겨 두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김 씨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A 씨가 고기를 굽는 데 집중하는 동안 김 씨는 차량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고 미리 준비해 둔 공기총을 꺼냈다. 미리 영점 조준이 돼 있던 총구를 A 씨의 등에 향했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에 맞은 A 씨가 쓰러지자 김 씨는 천천히 그의 곁으로 향했고 다시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총 5번의 총성이 추가로 이어졌고, 차 안에 숨겨둔 야구방망이를 꺼내 한 차례 더 내리쳤다.
A 씨가 숨진 것을 확인한 김 씨와 B 씨는 현장에서 8m가량 끌고 가 약 1.1m 깊이의 구덩이를 파서 A 씨를 거꾸로 매장했다. 발바닥이 보이자 돌로 가려 놓기도 했다. 둘은 다음날 5월 8일 새벽 4시께 현장에 다시 돌아가 현장에 흩어져 있는 혈흔을 흐트러뜨리기도 했다.
이 같은 B 씨의 자백으로 경찰은 그를 검찰에 즉각 송치했고, 죄질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검찰은 재판에서 B 씨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다. 법원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검찰은 “형량이 낮다”며 항소했고, B 씨는 “살인 공모 혐의밖에 없다. 억울하다”며 항소했다. 이러한 주장을 일부 받아들인 법원은 2심에서 징역 15년을 구형했고 B 씨는 또 다시 항소했지만 대법원이 기각하면서 그는 15년간 교도소에 수감됐다.
김 씨가 국내로 송환된 이후 사건 현장을 검증하는 모습. 사진제공=이천경찰서
하지만 사건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주범인 김 씨였다. 앞서 B 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김 씨와 B 씨가 지난 1990년 6월 23일 일본으로 출국했던 사실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김 씨가 고향 후배 두 명에게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취업시켜 주겠다”며 여권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받아간 정황도 드러났다. 김 씨가 이 서류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신분을 위조해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이후 같은 해 7월 김 씨와 B 씨는 배를 통해 부산항으로 들어왔지만 타국에서의 생활이 두려웠던 B 씨는 한국에 남기로 하고, 김 씨는 8월 13일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이후 경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이천경찰서 등은 2003년, 2006년에 걸쳐 해당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하기도 했지만, 국내에 있는 김 씨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수사에는 한계가 있었다. 통화내역, 통장 거래 내역 등을 확인 했지만 김 씨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던 것. 하지만 지난 2014년 4월, 김 씨가 경기경찰청으로부터 인터폴 적색수배로 전환되며 다시 수사의 새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일본 사이타마현 경찰이 전담팀을 구성해 지난해 11월 김 씨를 불법체류 혐의로 검거했다. 김 씨가 지인 등과 전화연락을 한 단서를 확보한 전담팀이 이를 토대로 신분을 위장하고 살던 그를 찾아낸 것이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24년이 되는 해였다.
경찰 조사 결과 김 씨는 그동안 일본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으로 넘어가 기술을 배워 귀금속 가공업으로 돈을 벌었고, 현지에서 일본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려 두 명의 자녀까지 두고 있었다. 원화로 한 달에 400만 원에서 500만 원, 많게는 1000만 원까지 벌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김 씨가 살던 지역은 해외 불법 체류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담당한 이천경찰서 강력3팀 김경률 경위는 “주변인 조사 과정에서 ‘김 씨는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좋다’는 진술을 들었는데, 실제로 수완이 좋았던 것 같다. 보통 해외도피 후 불법체류로 숨어 사는 범죄자들은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하루 벌고 하루를 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김 씨는 일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김 씨가 일본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점으로 인해 송환 절차도 복잡해졌다. 일본 법정에서 불법체류 혐의로 재판을 받은 김 씨는 지난 6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나 일본 입국관리국에 강제 수용됐다. 하지만 문제는 현지에 일본인 아내와 자녀들이 있어 가족 부양책임 등에 대한 문제로 강제 송환 심리가 길어졌다. 앞서의 김 경위는 “김 씨 가족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은 타국에 비해 송환 절차가 까다로웠다. 국내에서 재판을 치른 공범 B 씨에 대한 판결문과 김 씨 수사 협조 내용이 모두 같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재청구를 요청해와 총 3번을 바꿔서 청구했다. 담당 검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말했다.
결국 일본에서의 인도 허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면서 김 씨는 지난 3일 한일 범죄인인도조약상의 긴급인도구속제도를 통해 일본에서 송환됐다. 사건을 담당하던 이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된 김 씨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B 씨가 총을 쏴 살해했고, 나는 총 소리를 듣고 현장에서 도망쳤다”고 진술했다. 장기 도피 생활에 대해서도 “A 씨가 조직폭력배라 해당 조직이 나를 의심할 것이 두려워 도피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경찰은 징역형을 마친 B 씨의 법정 진술과 주변인 증언, 공기총 구입부터 현장 답사 및 범행 후 현장에 돌아온 점 등을 보고 지난 12월 10일 오전 경찰은 김 씨를 살해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김 씨의 25년 장기 해외 도피 생활의 종착지는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 될 수 없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해외 도피 범죄자들, 타국서 어떻게 살았나 21년 숨어살던 ‘마약왕’ 생활고 지쳐 결국 자수 그동안 검거된 해외 도피 범죄자들의 사례를 보면 그들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의 공기총 살인 사건의 주범을 지목된 김 씨의 경우처럼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라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증언. 대부분 신분이 보장되지 않은 불법체류자 신세이다 보니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정상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나 일용직 노동으로 힘겹게 산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 12월 2일 별거 중이던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박 아무개 씨(53)는 범행 직후 중국 베이징으로 도피해 6일 동안 연변 지역에 머물러 온 것으로 조사됐다. 이 과정에서 박 씨는 도피를 부탁한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었고, 지인의 설득으로 지난 8일 오후 5시께 청주공항으로 입국해 경찰에 체포됐다. 지난 11월 29일에는 21년 동안 외국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마약왕’ 김 아무개 씨(69)가 검거됐다. 김 씨는 지난 1994년 4월 3일 필로폰 238g(현 시가 8억 원 상당)과 헤로인 288g(당시 시가 1억 1500여만 원 상당)을 태국에서 국내로 몰래 들여와 나흘 뒤 C 씨(당시 32세)에게 전달한 뒤 태국으로 달아났다. 김 씨는 지난 1996년 태국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는 말레이시아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숨어 지냈다. 그는 주차장 종업원부터 무역회사 영업사원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며 20년 넘게 도피생활을 했다. 김 씨는 도피에 대한 두려움과 생활고에 지쳐 이달 9일 말레이시아 한국대사관에 ‘스스로’ 불법체류 사실을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국내에서 범죄를 저질러 해외로 도피한 와중에 더욱 흉악한 범행을 저지른 범죄자도 있다. 지난 2013년 10월 16일 필리핀에서 송환된 ‘필리핀 악마’ 최세용(47)이다. 그는 두 명의 일당과 함께 지난 2007년 7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소재 한 환전소에서 여직원을 살해하고 금고에 있던 현금 1억 8000만 원을 챙겨 달아났다. 이후 필리핀으로 도주한 최 씨 일당은 납치범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대상은 필리핀에 관광을 온 한국인들이었다. 한때 ‘필리핀 한국인 납치사건’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바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필리핀 조폭이 아니라 최세용 일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 씨 일당이 지난 2008년 11월부터 2012년 5월까지 납치와 강도짓을 한 한국인 관광객만 총 19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파악된 금액만 5억여 원이다. 이 과정에서 살해된 한국인 관광객은 3명이다. 지난 10월 16일 1심 재판부인 부산지법 제6형사부는 최 씨에 대해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