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우스’ ‘꽃미남’ ‘아줌마 퍼머’ 등으로 불리며 인기 상종가를 올린 8강 신화의 주인공 안정환(26·페루자)은 동점골, 골든골, 승부차기 등 극적인 골 성공으로 국민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특히 4강 진출의 분수령이 됐던 이탈리아전에서의 골든골은 안정환의 인기를 더욱 치솟게 만든 계기가 됐다.
경기직후 소속팀인 이탈리아 페루자의 루치아노 가우치 구단주가 지극히 감정 섞인 망언을 해 안정환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2년여를 뛰고 뒹굴던 팀의 구단주가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장본인’이라며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을 때 그의 기분은 참담했다.
월드컵 이후 대표팀 선수 중 가장 높은 액수의 몸값을 받고 외국 명문팀으로 이적할 가능성이 높은 안정환의 향후 계획을 소개한다.
안정환은 이탈리아전을 치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때 페루자에서 선수 생활을 같이 했던 마르크 마테나치(인터밀란)가 트레이닝복을 입고 이탈리아팀 벤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 안정환은 거기서 예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테나치가 페루자에서 주전으로 활약할 때 안정환은 팀의 후보 선수로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기약없는 기회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기만 했다.
안정환은 당시 마테나치를 비롯한 다른 주전 선수들이 흘리는 땀방울이 너무나 부러웠다. 자신도 그들과 함께 뛰고 구르며 진한 땀냄새를 맡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안정환은 남다른 각오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동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온갖 텃세와 설움을 겪은 터라 그들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아 솔직히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인간적인 오기도 생겼다. 그런 감정적인 대응이 게임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지만 경기 초반 페널티킥을 실축한 데 따른 부담이 내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후반 들어 히딩크 감독이 선수를 교체할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쩌면 자신을 벤치로 불러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행히 감독의 믿음 덕분에 안정환은 연장전까지 분투하며 골든골을 따내고서야 마음의 짐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안정환의 아내 이혜원씨는 이탈리아전이 끝난 뒤 남편과 나눈 얘기를 들려주었다.
“골을 넣는 순간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설움, 아픔 등이 필름처럼 지나갔다고 해요. 그래서 눈물이 났대요. 이젠 됐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제가 직접 이탈리아에서 본 오빠의 모습은 너무 외로워 보였어요. 한국의 언론조차 오빠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깜깜 무소식이었거든요. 선수가 잘나갈 때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 때 더 많은 격려와 용기를 주는 배려가 너무나 그리웠어요.”
골잡이로의 완전한 변신. 안정환에게 이번 월드컵은 너무나 중요한 대회였다. 어떤 성적표를 받아내느냐에 따라 자신의 진로가 좌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우선 좋은 성적을 거둬야만 했다.
안정환이 이상적으로 꼽는 선수상은 팀에서 쓸모있는 선수가 되는 것. 특히 23명 엔트리 선발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가 당락의 중간에서 오락가락했다는 사실에 이미 큰 상처를 받은 터라 코칭스태프는 물론 선수들 사이에서도 정말 필요한 선수가 되고 싶었다.
솔직히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활동해왔다는 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만심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해외파, 국내파 가리지 않는 선수 선발원칙을 갖고 있었다.
안정환은 비로소 파악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선 겉멋이나 경력을 내세우기보단 무조건 발가벗고 뛰어들어가 부딪치고 깨져가면서 자신이 유용한 사람이라는 걸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니저이자 친형처럼 안정환을 돕고 있는 티그리폰사의 양명규 대표는 “가장이라는 책임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안정환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안정환은 월드컵의 매 경기를 마치 최후의 결승전인 양 뛰어다닌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발표된 병역면제 결정은 엄청난 낭보였다. 결혼 전 안정환는 아내 이씨를 붙잡기 위해 장모될 분에게 꼭 한 가지 거짓말을 했었다. 자신은 외아들이라 군대 안가도 된다고 하여 결혼 승낙을 받아냈던 것. 이후 군 입대 문제는 풀지못한 숙제처럼 안정환의 발목을 붙잡는 마음의 짐이었다. 그런데 16강 진출과 함께 이 문제도 해결되었다. 아내와 통화 중에 병역면제 소식을 전해듣고 두 사람은 수화기를 든 채 펄쩍펄쩍 뛰었다고 한다.
이혜원씨는 남편 안정환의 진로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오빠가 요즘 전화하면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어봐요. 오빤 내가 원하는 나라로 가겠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탈리아엔 있고 싶지 않아요. 잉글랜드나 스페인 쪽이었으면 좋겠어요. 한창 연애할 때도 이탈리아 이전에 스페인에서 입단 제의가 왔었어요. 그 당시에도 물어보더라고요. 어디가 낫겠냐고. 축구에 대해 문외한이라 이탈리아가 축구로는 유명하단 생각만으로 이탈리아가 좋다고 했더니 주저없이 페루자와 계약을 맺더라고요.”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면서 아내에게 중대한 선택권을 넘겨주는 안정환의 마음 씀씀이와 깊이가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다.
티그리폰사의 양명규 대표는 안정환의 진로와 관련, 몸값을 최대한 올려주는 곳, 그리고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을 대상으로 물밑작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잉글랜드의 첼시와 에버튼, 그리고 이탈리아 세리에A의 두 팀에서 구체적인 액수를 제시하며 적극공세를 펼치고 있는데 평균 몸값이 2백만∼3백만달러를 웃돈다고 한다.
소속팀 페루자에서는 구단주의 우발적인 방출발언을 철회하고 일단 안정환을 1백60만달러에 완전 영입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지만 안정환은 이미 페루자에 마음이 떠난 것 같다는 게 양 대표의 설명이다. 안정환과 아내 이씨, 그리고 양 대표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안정환의 향후 진로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가 유력한 팀으로 점쳐진다.
월드컵이 끝난 뒤 대표팀 생활에서 벗어나면 아내와 전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 투어를 할 예정이었으나 최근 계획을 수정했다. 국내에선 어딜 가도 맘 편히 식사할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국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 아마도 그 여행 중에 안정환은 아내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