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과 정치권 인사·기업 오너들과의 유착은 사실상 시스템화돼 있다는 비판이 많다. 일요신문 DB
연루된 기업은 경남기업·포스코·성진지오텍. 이와 관련, 검찰은 산업은행의 전직 부행장을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가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기소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법원은 지난 9일 1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이 사건은 종착지에 거의 다다른 모습이다. 수사 과정에서 전 정권의 핵심 인사와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거론됐으나, 법원의 판단을 받은 이는 달랑 전임 부행장 한 명이다. 그나마 무죄를 선고받았다지만 산업은행이 혈세를 유용했고, 정치권과 부적절한 동침을 맺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사정정국 때마다 정례 행사처럼 찾아오는 특혜와 부실 대출 의혹. 여기에 주채무계열에 대한 낙하산 논란까지. 산업은행의 부끄러운 민낯이 다시 한 번 드러난 셈이다.
올해로 창립 61주년을 맞은 산업은행은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이끌었다는 영광과 함께, 불법 정치자금과 부실 대출 의혹이라는 그림자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지난 1997년에는 한보철강에 8300억 원의 부당 대출을 한 사실이 발각된 바 있고, 2000년 6월에는 현대상선에 4000억 원을 대출하면서 청와대의 전화를 받았다는 증언도 제기됐다. 2006년 현대차그룹 로비 사건의 김재록 게이트에도 연루됐다. 또 지난 2008년에는 신정아 전 동국대학교 교수가 근무했던 성곡미술관에 7000만 원을 후원한 사실이 드러나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우건설·STX조선해양의 분식회계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산업은행과 정치권의 유착은 사실상 시스템화돼 있다는 비판이 많다. 돈을 쥔 산업은행, 산업은행을 조종하는 정치권, 정치권을 후원하는 기업 오너들. 기업이 어려워지면 정치권은 산업은행에 압력을 행사해 자금 지원을 이끌어낸다. 산업은행 관계자들은 정치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든, 퇴임 후 자리를 보장받기 위함이든 이에 협력한다. 도움을 받은 기업인들은 산업은행 임원들에게 조용히 임원 자리를 보장해 준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권력 실세와 가까운 인물이 산업은행의 수장을 맡으면 금융당국은 사실상 통제가 어렵다”고 말한다.
기획재정부에는 퇴직자들의 일자리를 봐주는 조직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기재부 출신 관료들이 산하기관으로 내려가는 길을 닦아주고 관리한다는 것. 그 나름의 논리는 있다. 각 부처와 기관이 재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국가 재정과 지출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오랜 기간 기재부의 우산 밑에 있었던 산업은행도 임직원들을 투자·출자 기업으로 내려 보낸다. ‘한계기업에 국민 혈세를 올바로 사용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라는 논리로.
이런 가운데 산업은행과 가까운 일부 회사들이 올해 낙하산 인사 문제로 시끄러웠다. 산업은행이 주채무계열 기업들의 대표이사 선임에 입김을 넣었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이 최대주주인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고재호 전 사장의 임기가 끝나자 곧바로 교체 의지를 드러냈다. 고 전 사장은 어려운 대외 여건 속에서도 지난해 조선 빅3 중 유일하게 수주 목표를 달성한 인물로, 연임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연이어 터진 임직원들의 상납 비리가 고 사장의 발목을 잡았다.
산업은행은 이를 빌미로 산업은행 출신인 정성립 사장을 후임으로 앉혔다. 정 사장의 산업은행 경력은 짧지만, 과거 대우조선해양과 STX조선해양의 대표이사를 지내며 산업은행과는 긴밀한 관계를 이어온 인물로 알려졌다. 노동조합은 이 같은 낙하산 인사에 반발하며 총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소용은 없었다.
사실 산업은행 임원이 퇴임 후 가는 ‘고정된’ 회사는 여러 곳 있다. 성신양회가 대표적이다. 산업은행과 오랜 기간 여신거래를 맺은 성신양회의 부회장 자리는 언제부턴가 산업은행 출신이 앉아왔다. 현재 산업은행 기획관리본부장 출신인 김영찬 부회장이 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 부회장 전에는 산업은행 부총재보 출신인 김재실 씨가 맡았다. 김재실 전 부총재보의 경우 경남기업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위세를 떨친 소금회(소망교회금융인모임) 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산업은행의 투자를 받거나 채무를 지고 있는 기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산은맨들은 여럿이다. 쌍용양회의 경우 석호철 전 산은캐피탈 부사장이 사외이사로, 윤재민 전 산업은행 교수단장이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금호타이어에는 박우양 전 산업은행 이사가 사외이사로 근무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에서는 김갑중 전 부행장이 얼마 전까지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자리했다.
이밖에 임홍용 전 산은자산운용 사장은 동국제강의 고문으로 일했고, 한국항공우주에는 공정택 상무·노상균 감사, STX조선해양의 정경채 감사, STX중공업의 심상운 사외이사 등이 산업은행 출신으로 주채무계열의 임원이나 사외이사를 지냈다.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의원에 따르면 지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산업은행 출신으로 재취업한 퇴직자 47명 중, 31명(66%)이 주거래 기업의 대표이사·상임이사 등으로 재취업했다. 재취업 사유로는 대부분 ‘안정적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운용 투명성 확보’를 꼽았다. 그러나 동양그룹의 경우 지난 2003년부터 10년 동안 13명의 산업은행 출신을 부회장·고문·감사·사외이사 등 고위직으로 기용하고도, 결국 지난해 부도를 맞았다.
산업은행에 낙하산 문화가 워낙 만연해 있다 보니 지난 2009년에는 “직원들은 뒷전이고, 임원들만 퇴임 후 자리를 봐주느냐”며 노동조합이 반발 성명을 내기도 했다. 복마전이 따로 없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대가성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으나, 동종업계 취업이 아니기 때문에 기업이 원한다면 법률상 제한 받을 게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김서광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