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본선 1라운드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 5월 28일, 히딩크 감독이 숙소를 나서며 취재진에 둘러싸여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도 당시엔 불안 했다고. 특별취재단 | ||
하지만 큰 리더, 히딩크의 속내를 그때마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2002월드컵이 낳은 또 다른 스타, 히딩크 감독에게 대표팀 선수 기용 문제 등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일었던 의문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답변은 언론 담당관 허진 씨가 정리해줬다.
▲대표팀을 이끌며 가장 위기의식을 느꼈을 때가 지난해 체코와의 경기에서 0-5로 졌을 때였다는데.
사실이다. 지난해 6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0-5로 패하고 체코와의 평가전에서마저 0-5로 졌을 때는 버틸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 뒤에 벌어진 나이지리아전에서 2-2 무승부의 결과를 얻었는데 만약 그때 나이지리아에게도 졌다면 감독 갈아치우라는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올해 북중미골드컵 때도 여론의 반응이 무척 좋지 않았다.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표로 인해 밖에서 보는 위기의식도 팽배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경기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계획대로 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난 6월10일 미국과 무승부를 이룬 후 팀내에서 불화설이 나돌았는데.
물론 첫날, 그 다음날까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불화설이 나올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기대했던 포르투갈이 폴란드를 4-0으로 이기는 바람에 잠시 동안 선수들을 긴장시키긴 했지만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원래 다혈질이다. 우리 선수들이 잘만 이끌어 간다면 실제로 옐로카드나 레드카드 한두 개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된다면 쉽게 흔들릴 것이고 우리 선수들이 포르투갈을 요리하기는 쉬울 거라는 예측이 적중했다.
▲박지성이 부상으로 포르투갈전에서 뛸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선발 출전해서 골까지 넣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난 축구에 수적 개념을 도입시켰다. 즉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정신력, 담대함 등을 아주 다양한 요소로 나눠 그것을 전부 결합시켜 숫자화시키는 것이다. 박지성은 부상 정도만을 놓고 봤을 때는 이번 월드컵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정신력 부문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투지가 있었다.
그걸 믿었던 것이다. 즉 부상에 대한 두려움보다 다리가 부러져도 좋다. 그라운드에서 쓰러져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에 뛸 수 있었다. 박지성의 파이팅에 높은 점수를 매겼는데 그게 먹혀 들어간 셈이다.
▲ 지난 4일 폴란드전에서의 히딩크 감독. | ||
만약 내가 설기현에게 골만 넣는 스트라이커이기를 바랐다면 그는 오래 전에 탈락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전까지 근 1년 동안 한 골도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를 중용하는 이유는 한국팀 공격수 중에 공이 없을 때의 모션이나 수비 가담능력이 가장 뛰어나서다.
자신이 전담하고 있는 수비수가 공을 가지고 우리 문전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차단시킨다든가 미드필드까지 내려와 압박을 해주는 센스 등은 굉장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골 결정력만 따진다면 황선홍이 훨씬 낫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시스템상에서 설기현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논란이 있는 차두리를 엔트리에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다양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차두리를 뽑은 이유는 그의 체력과 스피드 때문이다. 후반 15분 정도 남겨 두고 상대방의 체력이 약화됐을 때 투입한다면 비록 득점과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상대 수비수들을 충분히 유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험이 적다보니 미숙한 골 처리 능력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그래서 조커로 쓰기에 애로사항이 있다. 차두리는 이번 대회보다 다음 월드컵 때 제대로 활약할 것이다.
▲수비가담 능력과 체력 부족 등의 이유로 안정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으로 안다. 안정환이 어느 순간부터 눈부신 변화를 이뤘나.
슈팅이 아주 좋아졌다. 이탈리아에선 공격수들이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다. 수비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곽에서 중거리슛을 많이 쏘는 특징이 있는데 이런 경험들이 안정환에게 보약이 된 것 같다. 요즘엔 일단 슈팅 날리면 골이 되든 안되든 과감하게 들어간다.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다는 증거다.
안정환의 포지션을 어떻게 놓느냐 하는 문제로 오래 고민을 했다. 계속 지켜본 결과 안정환은 골대와 가장 가까운 데서 파괴력을 발휘했다. 센터포워드 자리가 제격이었다. 그러나 안정환은 센터포워드를 해본 적이 없다.
만약 센터포워드 자리를 맡았던 김도훈이나 이동국이 탈락하지 않았다면 안정환은 기용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공격수는 얼마 안되고 센터포워드 자리는 비어있고 또 안정환도 그 자리에서 높은 골 결정력을 보이고 해서 포지션을 옮긴 것이다.
▲ 지난 10일 미국전이 열리기 전 이색적 응원을 펼치는 여성 응원단. | ||
그렇지 않다. 사실 예전에 맡았던 팀들에서 보여준 제스처보다는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말 너무나 기분 좋은 순간에 표현된 계산되지 않은 행동들이다. 내가 그동안 맡았던 팀들은 명문팀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한국대표팀을 맡았을 때 겉으로는 당당한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속으로 걱정되는 부분도 많았다. 답답했고 초조했다. 어떤 순간에는 확신이 무너질 때도 있었다. 정말 16강에 진출할 수는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폴란드와의 첫 경기 후 이전의 걱정들이 말끔히 해소됐다. 정말 기뻤다. 날 믿고 묵묵히 따라준 선수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런 감정들이 세리머니에 나타나는 것 같다.
▲골키퍼 경쟁이 치열했다. 김병지 대신 이운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마지막까지 힘들었던 부분이다. 김병지는 훌륭한 골키퍼다. 풍부한 국제무대 경험과 동물적인 골 방어 능력,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침착성 등은 높이 칭찬해줄 만하다. 코칭스태프조차 다른 10명의 선수들에 대해선 다 꿰고 있었지만 골키퍼만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막판까지 저울질하다가 이운재를 선택했다. 힘든 결정이었다.
▲월드컵 직전 독일에서 활동중인 심재원을 불러들였다가 최종 엔트리에 올리지 않았다. 명단에 들어갈 수 없는 선수를 왜 합류시켰나.
당시 이민성이 부상을 당했고 홍명보도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수비수 5명 중 2명이 부상이라면 친선게임조차 치르기 버거운 상황이다. 수비수 커트라인 바로 밑에 있는 선수가 심재원이었다. 그래서 본인의 의사를 물었고 그는 불러만 준다면 무조건 귀국하겠다고 답했다. 심재원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만약 심재원이 독일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 단점도 고쳐주고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나이가 젊으니까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딩크 감독은 개인적으로 최용수, 윤정환 등이 월드컵 무대에서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에서 두 선수의 자리가 마땅하지 않았을 뿐 만약 다른 감독을 만난다면 지금보다 훨씬 안정되고 향상된 기량으로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