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8호의 무사 귀환을 전한 <경향신문>의 당시 기사
당시 미국 우주항공국 나사(NASA)의 유인 우주선 발사 도전은 한 마디로 무모한 기획이었다. 이미 우주전쟁의 한 폭을 담당했던 라이벌 소련은 아폴로8호 발사 며칠 전 유인 우주선 발사를 기획했었다. 하지만 당시 달 왕복 탐사를 목적으로 발사가 기획됐던 소유스 1호는 1967년 추락 사고를 겪었고, 소유스에 타고 있던 비행사 코마로프는 운명을 달리했다. 이후 소련은 안전을 이유로 정부 인가 결정을 주저했다.
그렇게 미국 나사의 두 번째 유인 우주선 도전이 시작됐다. 발사 전만해도 대다수 천문학자들은 “터무니 없는 도전”으로 이들의 도전을 평가 절하했다. 게다가 당시 아폴로 8호는 사령선체만 있었을 뿐, 임시대피처로 쓸 수 있는 별도의 선체 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 사고가 난다면 탑승자들의 생명은 끝이었다. 이후 사고를 겪은 아폴로 13호의 경우 별도의 착륙 선체가 있었기에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프랭크 보먼 선장과 윌리엄 앤더슨 달 착륙선 조종사 등을 태운 아폴로 8호는 이러한 우려를 뒤로 한 채, 1968년 12월 21일 지구에서 날아올랐다. 아폴로8호는 전 인류의 우려를 극복하고 결국 사흘만에 달 궤도에 다다랐다. 이 때 승무원은 크리스마스 이브 특집방송으로 우주쇼를 진행했다. 특히 이들이 성서인 창세기를 읽을 당시 미국 텔레비전 시청률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특히 아폴로 8호의 달 착륙선을 조종했던 윌리엄 앤더스는 인류 최초로 달 후면을 목격한 사람으로 기록됐다. 당시 아폴로 8호의 달 왕복 탐사 성공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특히 소련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당시 아폴로 8호의 서브 승무원으로 참여했던 닐 암스트롱은 2년 후 아폴로 11호를 이끌고 달에 인류의 첫 발자취를 남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