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3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서울시향 감독으로서 마지막 지휘를 마친 뒤 차량에 탑승하며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직원들 주장의 배후에 정명훈 예술감독이 있는 것 같다.”
지난 2014년 12월 5일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가 언론에 던진 말이다. 이어 ‘정 감독이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박 대표와 일을 할 수 없으니 12월 초까지 박 대표를 정리하면 재계약하겠다고 말했다’는 얘길 서울시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자신을 정치적 희생양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사회를 하루 앞두고 박 전 대표는 돌연 서울시향을 떠났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여러 가지 왜곡과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로 많이 다쳤고, 공정하지 못한 일방적인 조사로 많이 힘들었다”며 “억울한 부분도 많지만 저의 힘든 마음은 일단 묻고 떠납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으로 믿고 있다”고 억울한 심정을 밝혔다. 반면 2006년부터 서울시향을 이끌어 온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은 감독 계약을 1년 연장했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정명훈 배후설’은 떠나는 이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박 전 대표를 둘러싼 구설이 그만큼 충격적이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CEO 출신 여성 대표가 남자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얘기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박 전 대표의 말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우선 지난 2015년 8월 종로경찰서는 박 전 대표의 성추행 혐의 등을 검찰에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고, 검찰 역시 박 전 대표를 무혐의 처분했다.
상황은 급변했다. 박 전 대표는 무혐의 처분을 통해 피의자 신분에서 벗어났고 당시 박 전 대표를 고소한 서울시향 직원들은 박 전 대표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입건돼 고소인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후 경찰을 통해 정 감독의 비서가 연루된 사실이 포착됐고 이번엔 정 감독의 부인 구순열 씨까지 입건됐다.
경찰은 박 전 대표에 대한 서울시향 직원들의 고소 과정에 구 씨가 연루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매체는 그 근거로 구 씨와 정 감독의 비서인 백 아무개 과장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공개했다. 여기에서 구 씨는 백 과장에게 ‘시나리오를 잘 짜서 진행하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으며 백 과장은 며칠 뒤 ‘곽 씨를 고소인으로 섭외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실제 곽 씨는 이후 박 전 대표로부터 회식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결정적인 피해자였다. 지금은 당시 주장이 허위로 밝혀져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상태다.
해당 문자는 지난 2014년 11월에 주고받은 것으로 서울시향 직원들이 박 전 대표의 사임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하기 한 달 전이다. 뿐만 아니라 구 씨는 박 전 대표를 겨냥한 사무국 직원들의 투서 발송, 기사화, 성추행 고소를 지시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현재 구 씨는 경찰에 입건됐지만 시향 사태 이후 프랑스에 머물러 한국에 들어오고 있지 않다. 경찰은 구 씨에 범죄 혐의자에게 적용되는 ‘입국 시 통보’ 조치를 내린 상태다.
그럼에도 서울시향은 정 감독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우선 거센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울시향은 정 감독과의 재계약을 추진했다. 결국 서울시향 이사회는 지난 연말 정 감독과의 재계약을 보류하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1월 중순 전에 추가 협의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뒤숭숭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서울시향 내부에선 정 감독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서울시향 관계자는 “아직 수사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그런 정황이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검찰이나 경찰이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보도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 12월 30일 예술의 전당에서 정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휘하는 서울시향 공연이 이뤄졌는데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이 로비에 나와 ‘서울시립교향단 단원 일동 호소문’을 관객에게 나눠줬다. 여기서 단원들은 “정 예술감독 사퇴로 이어진 이번 사태의 본질은 서울시향 사무국 직원들에 대한 박현정 전 대표의 인권 유린”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 감독이 서울시향을 떠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언론을 통해 공개서한을 보내 그런 입장을 밝힌 것. 지난 12월 29일 정 감독은 공개서한을 통해 서울시향을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서울시향은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는 업적을 쌓았지만 한 사람의 거짓말에 의해 무색하게 돼 마음이 아프다”며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또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는데, 그 사람들이 오히려 고소를 당해 조사를 받았다”며 “이 인간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여러분과 함께 음악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공개서한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부분은 10년 동안 몸담았던 서울시향을 떠나는 심경보다는 검·경찰의 수사에 대한 불신, 그리고 박 전 대표에 대한 반격이다. 정 감독의 법률 대리인 역시 “정 감독의 부인은 박 전 대표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직원들의 사정을 알게 되자 심각한 인권문제로 파악해 이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도록 도와준 것일 뿐이라며 박 전 대표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박 전 대표가 언론사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서울시향을 떠난 뒤 매스컴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던 박 전 대표가 강한 어조로 정 감독에게 항의한 것. 공개서한에서 박 전 대표는 “‘한 사람의 거짓말’이라면서 무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저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다시 한 번 인격살인 하신 것”이라며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유일한 희망인 경찰 수사 결과만 간절하게 기다린다. 10개월 넘게 귀국하지 않고 유럽에 계신 구순열 사모님께서도 속히 귀국하셔서 경찰 조사에 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시 진실게임이다. 이미 경찰 조사에선 무혐의로 드러났지만 정 감독과 서울시향 측은 박 전 대표의 직원들에 대한 폭언 및 성추행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 전 대표와 정 감독은 서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며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상황은 박 전 대표가 유리하다. 성추행 사건에서 검경이 박 전 대표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명예훼손 사건에서도 박 전 대표가 이길 경우 정 감독에겐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자칫 입건된 부인 구 씨까지 사법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 이번 명예훼손 사건에서 무혐의가 나오는 등 정 감독 측이 승리할 경우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형사 사건에서 무혐의는 아예 혐의가 없는 경우뿐 아니라 해당 범죄의 증명이 부족한 경우도 포함된다. 정 감독 측 법률대리인은 매스컴을 통해 “무혐의라고 해도 그 사실이 허위였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 수사 결과 발표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
박현정 전 대표는 왜? “방만경영 개혁 노력했을 뿐” 박현정 전 대표. 일요신문DB 박 전 대표 역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직설적이고 거친 화법에 대해 인정했지만 폭언을 절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결코 편안한 상사는 아니지만 직원들에게 대놓고 욕한 적은 결코 없다”며 “규정이나 회계에 위반되더라도 모든 것이 정 감독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서울시향의 방만한 경영을 개혁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최] |
정명훈 감독은 왜? “그는 건드릴 수 없는 존재” 아이러니하게도 박현정 전 대표가 서울시향을 떠난 지 꼭 1년 만에 정명훈 감독도 시향 지휘봉을 놓았다. 일요신문DB 실제로 정 감독이 서울시향에 기여한 공은 크다. 서울시향은 원래 서울시 소속 예술단체였지만 정 감독이 오면서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것이다. 세계적인 지휘자를 영입했다는 것만으로 서울시향의 위상은 높아졌고 기업 후원금도 크게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향에서 받는 혜택이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2015년 한 해 동안 정 감독은 배우자와 함께 외국과 한국을 오갈 때 1등석 두 장을 지급받았다. 정 감독이 호텔비를 청구할 경우 서울시향에서 보조했기 때문에 집수리를 이유로 호텔비를 지원받기도 해 박 전 대표와 갈등을 빚은 적도 있다. 2016년 재계약 안에는 이보다 더 많은 지원이 명시돼 있어 호화계약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박 전 대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 감독은 서울시향 일정을 어기면서까지 개인 활동을 우선시했고 계약 위반도 잦았다”며 “그래도 사람들은 그만한 인재가 없다면서 감쌌다. 아무리 거장이어도 최소한의 도덕성은 있어야 한다”고 정 감독을 비판했다. 서울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는 “정 감독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서울시에 팽배하다”며 “지난 10년의 성과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