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처음 등장했던 ‘스케이트보드’가 미국 중년들 사이에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한 장면.
“나는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고로 존재한다.”
일요일 오전,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뉴저지의 공원 언덕. 한 중년의 남성이 오토바이 가죽옷과 헬멧을 쓴 채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남성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내 스무 명가량의 남성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잠시 후 보호장비로 무장한 이들은 저마다 스케이트보드를 힘차게 굴리면서 언덕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매주 주말 공원에 모여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이들은 ‘버건 카운티 폭격기’라는 이름의 동호회 회원들이다. 스케이트보드 동호회 회장인 톰 반하트의 나이는 올해 50세. 5년 전 다시 스케이트보드에 발을 올려놓았던 반하트는 “카터 정부 시절 이후 다시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했다”면서 “아이들이 다 크자 개를 한 마리 키우기 시작했다. 개도 다 크니까 이제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지루하고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스케이트보드를 다시 시작한 것은 갑자기 찾아온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맨해튼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반하트는 2007년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나자 결국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40만 달러(약 4억 6000만 원)의 채무를 떠안고 실업자가 됐던 그는 “사업 실패로 인해 좌절했던 나는 거의 망가질 뻔했었다”라고 말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놀랍게도 젊은 날의 추억이었다. 파산 후 무기력함에 시달리던 그는 기분 전환할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파산하지 않았다면 포르셰 정도는 거뜬히 몰 수 있었겠지만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다. 그러던 중 먼 옛날 재미를 들였던 취미가 하나 떠올랐다. 바로 ‘스케이트보드’였다.
그렇게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일상의 고뇌를 잊게 됐던 그는 “내 인생의 시계는 거꾸로 되돌리지 못한다. 하지만 오래전의 젊은 감성은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속도를 낼 때면 ‘중년의 위기’는 멀리 날아버린다는 것이 그의 설명.
반하트처럼 40대를 훌쩍 넘긴 후 다시 스케이트보드를 취미로 삼은 미국의 중년들은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이런 현상은 특히 고령화되고 있는 X세대들과 그 이전 세대들 사이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 스포츠용품협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35세 이상 스케이트보드 인구는 40만 4000명에서 74만 20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스케이트-기저’들 덕분에 스케이트보드 관련용품 매출도 덩달아 늘어났으며, 무릎 및 팔꿈치 보호대 판매량 역시 눈에 띄게 증가했다. 스케이트보드 판매 시장의 10%를 중년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중년들의 경우, 품질과 안전에 투자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스케이트보드 동호회 ‘버건 카운티 폭격기’의 회장 톰 반하트(왼쪽)와 매주 제자들과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텍사스대학 교육학과 부교수인 빌 로버트슨.
이밖에 중년들이 스케이트보드에 다시 매료된 것은 스케이트보드 위에 올라서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듯 다시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땀이 뻘뻘 나는 거친 운동이 아닌 데다 다른 레저 스포츠보다 부상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매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비용이 적게 들고, 폼이 난다는 것 역시 커다란 장점으로 꼽힌다.
5년 전부터 스케이트보드를 다시 타기 시작한 코네티컷의 조 보레스(44)는 출퇴근할 때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이유에 대해서 “스케이트보드에는 청춘, 펑크, 반항 이 세 가지가 결부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배드 보이즈’의 기분을 물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점심시간만 되면 밖으로 나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애틀랜타의 IT회사 직원인 채드 할(42)은 “보드 위에 발을 올려놓으면 모든 근육들이 동시에 한 가지에만 집중하게 된다”면서 “40대의 일상을 채우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직장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은 모두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스케이트보드가 중년의 고립감에서 해방시키는 창구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케이트보드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사교활동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실제 얼마 전에는 40대 이상인 30명의 스케이트보드 동호회 회원들이 돈을 모아서 자동차를 하나 구입한 후 3일 동안 스케이트보드 여행을 떠난 사례도 있었다. 이들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스케이트 공원을 찾아다니면서 하루 종일 원 없이 스케이트보드만 탔다. 그런가 하면 텍사스대학의 교육학과 부교수인 빌 로버트슨은 매주 40명의 동료와 학생들과 함께 스케이트 공원에 모여서 땀을 흘린다.
베를린자유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페터 발쉬부르거는 “40~50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꼭 심각한 위기는 아닐지라도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면서 “이럴 때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목록을 적어본 후 변화를 시도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런 방법 가운데 하나가 스케이트보드 같은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쉬부르거는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한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나 역시 하나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나이는 69세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