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9일 서울 인사동에서 청년·대학생 단체 회원들이 좋은 일자리를 요구하며 사원증 모양의 팻말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연합뉴스
피를 돈으로 사거나 판다는 ‘매혈(賣血)’이란 단어는 다소 낯설지만, 한때는 시가 등장할 정도로 성행한 적이 있다. 근근이 노동일을 하던 일부 가난한 이들은 결혼을 하거나 병원비가 필요할 때 등 목돈이 필요하면 피를 팔았다. 진공 유리병 속에 피가 빨려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빗대 매혈을 하는 사람을 ‘쪼록꾼’이라 불렀고, 상습적으로 매혈하는 사람은 ‘귀신’으로 통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피를 뽑는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임상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최근 다시 성행하고 있다. 기자가 직접 임상시험에 참가해 만났던 참여자들 가운데에는 지원하기 쉽고 편한 ‘꿀알바’로 여겨 임상시험에 참가한 대학생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하다 월세나 등록금 등을 위해 목돈이 필요해 임상시험을 찾은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임상시험 대상자 동의를 위한 설명서.
기자가 구인광고에서 찾은 시험도 생동성시험이었다. 고지혈증 약에 대한 시험이라는 소개 아래에는 사례비가 적혀있었다. 임상시험은 일주일 간격을 두고 두 차례 이뤄지고 한 번 참여할 때마다 1박 2일이 소요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받는 돈은 세금을 떼고 65만 원이었다.
생동성시험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키와 몸무게, 혈압, 맥박 등이 정상이어야 하고 약물을 복용해서는 안 된다. 일부 시험약마다 금지 음료, 음식 등이 있는데, 기자가 지원한 생동성시험 약은 자몽주스를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기자가 신체검사를 위해 찾은 한 종합병원 임상시험 센터에는 서른 명가량의 남자들이 모였다.
회의실에 모여 앉은 이들 앞에 담당 의사가 나타났다. 약에 대한 설명과 생동성시험의 취지, 부작용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날과 다음날까지 신체검사를 진행하는데, 총 30명의 피험자가 필요한 이번 시험에 70명을 모집했다고 했다. 검사 결과 이상이 있으면 참가할 수 없어 예비로 2배수를 뽑았다는 설명이었다. 이후엔 참가동의서에 서명을 했고 신체검사실을 정신없이 오갔다. 의사와의 면담을 마지막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일주일 뒤, 신체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문자를 받았다. 생동성시험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총 서른 명의 남자들이 모였다. 간호사는 시험 일정 등을 설명했고, 이어 가방 검사를 시작했다. 시험 기간 동안 흡연과 음주는 절대 불가하며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 외에는 간식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저녁 식사 이후로는 물만 마셔야한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후 3~5㎖ 정도 피를 뽑았다. 첫 채혈이었다.
임상시험 피험자는 2주 동안 20여 차례에 걸쳐 300~350㎖가량의 채혈을 한다. 연합뉴스
채혈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간호사가 작성하고 있던 투약 기록지를 볼 수 있었다. 피험자 30명이 A와 B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 그룹의 피험자는 1~15번까지 번호가 각각 매겨졌다. 기자는 A7, 그룹 A의 일곱 번째 피험자였다. 그룹을 둘로 나눈 것은 시험약과 대조약을 따로 투약하고, 결과를 서로 비교하기 위해서다. 기자가 속한 그룹 A는 한 국내 제약사에서 만든 카피약을 먹었고, 그룹 B는 기존 시판되고 있는 약을 투약 받았다. 다음 주에 시작되는 시험에서는 해당 약을 바꿔서 먹게 돼 있었다.
오후 6시 30분, 저녁 식사로 병원에서 제공한 도시락을 먹었다. 이후부터는 자유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부 피험자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대학 선후배 사이로 보였다. ‘베테랑’처럼 보이는 한 피험자는 후배들을 모아놓고 “노트북이랑 만화책 가져왔지? 내일까지 채혈 말고는 특별히 할 일 없으니까 알아서들 시간 잘 때워. 내일 아침 식사는 없으니까 배고파도 참아야 해”라고 설명했다.
기자 옆자리에 앉은 피험자(27)는 생동성시험 참가 목적이 명확했다. 바로 ‘돈’이었다. 병원 측이 설명한 대로 “이번 시험으로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이타적 동기’는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그는 “벌써 월세가 3달 밀렸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최대한 줄였는데도 매달 내는 등록금 대출 이자에 공과금에 남는 게 없다. 월세처럼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참여하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도 병행할 수 있고, 공부는 여기서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14년부터 3~4개월 간격으로 생동성시험 아르바이트에 지원한다고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무분별한 시험 참여를 막기 위해 한 번 시험에 참가한 피험자는 3개월 내에는 다시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다음날 오전 6시. 기상 후 세수하고 혈압을 쟀다. 의사 한 명이 졸린 눈으로 앉아서 “다음”을 외친다. 피험자들은 줄을 서서 청진기로 아주 짧은 진찰을 받았다. 번호가 적힌 조끼를 입고, 순서대로 채혈을 시작했다. 모두의 팔에는 카테터(지속적인 채혈을 위한 관 모양 기구)가 꽂힌다.
이날 총 13번의 채혈이 이뤄졌다. 오전에는 30분 간격으로 채혈이 이뤄졌고, 오후에는 2시간, 4시간, 6시간 등으로 간격이 늘어났다. 채혈 양은 한 번에 5~6㎖ 정도였다. 총 154㎖가량. 1기, 2기로 나눠 있으니 2주 동안 약 300~350㎖의 피를 뽑는 셈이다. 보통 헌혈이 400㎖가량의 피를 뽑는다.
채혈이 먼저 시작됐지만 투약은 오전 8시부터였다. 피험자들은 번호 순서대로 1분 간격으로 약을 먹어야 했다. 작은 약 한 알과 물 240㎖를 모두 마셔야 했다. 오전에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누워서도 안 된다.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대부분의 피험자들이 졸기 시작했는데 “절대 자면 안 된다”며 간호사들이 돌아다니며 깨웠다. 그 사이 채혈은 계속되고 있었다.
시험 도중 한 참가자가 “어지럽다”고 말했다. 간호사들이 계속해서 증상을 물어보고 상태를 체크했다. 혈압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담당 의사가 달려와 진찰하고는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설명했지만 해당 피험자는 “두렵다”며 시험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병원 측은 피험자의 의사대로 ‘시험 철회’를 했고, 침대에 누워 쉬었다 퇴원하라고 했다.
오후 8시 이뤄진 채혈을 마지막으로 1박 2일 동안 일정이 모두 끝났다. 그 다음 주에 같은 절차를 통해 한 번 더 시험에 참가하면 사례비를 받는다. 그러나 기자는 취재 일정 때문에 모든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임상 시험을 중간에 철회해, 사례비는 받지 못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앞서 기자의 옆에 앉았던 피험자에게 전화가 왔다. “사례비가 들어왔다”고 했다. 기자와 만난 그는 “생동성시험은 신체에 불필요한 약을 투여하는 게 아니라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3개월 뒤엔 또 월세가 필요할 거고, 다시 지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기자에게 “그래도 통장에 돈이 들어온 걸 보니 삼겹살이라도 먹고 싶다”고 말했다. 문득 피를 팔고난 이후엔 꼭 고기와 황주를 사먹던 ‘허삼관’이 떠올랐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