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난삽하게 이어지던 새누리당 공천룰 전쟁이 최고위원회의에서 추인을 받았다. 의원총회에 보고되면 의원들의 박수나 거수를 통해 형식적으로라도 의결되고, 당헌·당규 손질이 필요한 부분은 상임전국위원회를 열어 수정 의결을 거치게 된다. 새누리당은 곧 공천관리위원회도 출범시킨다. 하지만 큰 틀에서의 공천 기준만 마련됐을 뿐인데도 현역도 신인도 만족스럽지 않아 보인다. ‘요상한 룰’이어서 파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가 호사가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일요신문>이 찬찬히 뜯어봤다.
새누리당 공천룰 윤곽이 드러났지만, 핵심 쟁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공천제도특별위원회. 연합뉴스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로부터 후퇴를 거듭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상향식 공천’은 결국 공천과정에서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높이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물론 의총을 통한 총의 수렴과 상임전국위 의결이 필요하지만 어찌됐든 친박과의 싸움에서 명분을 챙긴 셈이다.
현행 당헌·당규는 당원 투표 50%와 일반국민 여론조사 50%를 더해 점수를 매겨왔다. 이번 최고위는 이를 ‘30%+70%’로 조정했다. 그간 친박계는 ‘50 대 50’, 비박계는 ‘30 대 70’의 비율을 주장해왔는데 결과적으로 비박 진영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김 대표가 체면치레를 한 셈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TK(대구·경북)지역에서는 곡소리가 나온다. 소위 ‘진실한 사람들’을 비롯한 친박계는 TK만은 물갈이되어야 한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김 대표는 체면을 세웠고 친박계는 TK 물갈이 가능성을 열면서 참 묘하게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당 공천제도특위 한 위원은 이런 말을 들려줬다.
“전국에서 당원 가입률이 가장 높은 곳이 TK다. 당원들의 현역의원 충성도가 가장 높은 곳도 TK다. 이 비율을 내리고 여론조사 비율을 높이면 당연히 지금 현역에게 불리하다. 아무리 현역이 인지도에서 앞선다지만 TK는 대통령이 한번 내려와 바람을 일으키면 여론이 이쪽저쪽으로 확확 뒤바뀐다. 과거에 다 그러지 않았는가.”
TK 의원들은 일찌감치 경선에 대비해 당원 관리를 해왔다. 그래서 도전자들 사이에선 ‘누가 1000명을 모았다’ ‘3000명을 모았다’ ‘절반이 거짓 명부다’ 등등 온갖 잡음이 나온 곳도 TK였다. 그만큼 당원 확보에 열을 올려왔다는 것이다.
결선투표를 실시하되 1, 2위 간 득표 차를 10%포인트(p)로 조정한 것도 묘하다. TK 물갈이론이 크게 회자한 마당이어선지 유독 TK에선 새누리당 예비후보들의 경쟁률이 치열하다. 어떤 지역구는 예비후보만 10여 명이나 된다. 현역이 독주하지 않는 한 주자가 많아지면 다 고만고만한 지지율이 나올 수밖에 없고, 현역이 월등하지 않다면 한 1, 2위 간 득표 차를 10%p로 벌리기도 쉽잖다.
대구의 한 초선 의원은 “도전장을 던진 대부분 예비후보가 본인을 진박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보내서 왔다고 하더라”라면서 “10프로(%p) 대작전에 돌입해야 할 것 같다”고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과거에 없었던 공천룰이 교묘하게 삽입된 점이다. ‘현역의원 컷오프라는 용어는 없어졌다’면서도 공천제도특위는 현역의 ‘부적격성 심사기준’을 만들었다. 범죄경력에서부터 본회의와 상임위 출석률, 법안 발의 실적과 통과율 등을 면밀히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 ‘당론 위반 행위 평가’라는 항목에 눈길이 쏠린다.
제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의 당론은 사실상 대부분 ‘청와대 교시’를 기준으로 삼았다. 수평적 당·청 관계는 곧 수직적으로 바뀌었다. 유승민 의원의 원내대표직 축출이 대표적인 사례다. 새누리당은 행정법안이 넘어오면 단일대오를 형성해 찬성표를 던져왔다. 본회의에 앞선 의원총회는 ‘표 단속’을 위한 형식적인 조치였다는 비판이 꾸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내에서도 소신투표를 감행한 의원들이 적잖다. 게다가 청와대 교시에 반대하는 의원총회 발언을 했거나 언론 인터뷰를 했던 사례도 모조리 찾겠다는 것이 이 ‘당론 위반 행위 평가’에 녹아 있다고 한다. 일부는 ‘유승민 축출’을 위한 항목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에 대해 공천특위 관계자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비박계 위원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공천관리위원회가 구성돼 거기서 디테일한 기준을 마련할 것이기 때문에 친박계 뜻대로 룰이 정해지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이 헌법기관인데 소신껏 투표하거나 발언한 것에 마이너스 점수를 준다면 여론도 들썩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지금 친박계는 오히려 공천관리위원회를 통한 ‘박심(박근혜 대통령 의중) 관철’에 정지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천관리위원회에서 ‘디테일의 승리’를 담보하겠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친박계 유기준 의원도 MBC 라디오에서 “공천관리위원회는 데드락(교착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방법을 고안해서 국민 눈높이에 맞는, 또 개혁에 부합하는 그런 공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보통 공천관리위는 현역 의원 일부가 포함되긴 하지만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외부 인사들도 다수 포함된다. 하지만 이 외부 인사들이 누구 누구 라인으로 거론되면서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례로 총선 출마가 거론되는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도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옛 공천심사위) 출신이다. 친박계가 자파에 유리한 인사를 대거 추천해 공천관리위를 수렴청정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정치신인’에게 가산점을 주는 기준에 대해선 더 말들이 많다. 당 최고위는 정무직 장관급, 전·현직 광역·기초단체장, 광역 의원 이상에 두 차례 출마 전력이 있는 사람을 정치신인에서 뺐다. 청와대 출신이나 현 정부 고위직 인사들은 모두 정치신인으로 분류한 것이다.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뺀 곽상도, 윤두현, 남호균, 전광삼 등 TK에 출마한 청와대 출신은 모두 가산점을 받게 된다. 청와대 출신으로는 이밖에도 김행(서울 중구), 백승주(경북 구미갑), 최상화(경남 사천·남해·하동), 최형두(경기 의왕·과천), 민경욱(인천 연수) 등도 있다.
가까운 예로 지난 19대 총선 당시 경북 구미갑에서는 3선이었던 김성조 의원에게 심학봉 후보가 도전했고 심 후보는 ‘이공계 출신 가산점’을 받아 역전한 바 있다(심 의원은 성폭행 논란으로 제명당했다).
이번 공천룰에서는 전·현직 여성 의원이 모두 10%의 가산점을 받는다. 김을동 의원을 비롯해 나경원 의원도 가산점을 받게 되면서 해당 지역 여론이 들끓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당 한 관계자는 “현역은 물갈이한다면서 여성 의원은 모조리 공천장을 받는 룰 아니냐. 여성 의원들이 있는 지역구에서는 항의하고 난리가 났다”며 “의원총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 넘어 산이다. 디테일의 악마에 걸린 의원들의 집단 반발이 관철될지 두고 볼 일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