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예상과 달리 새 경제부총리에 임명되지 않았다. 정부가 실무형보다 정무형 인사를 원했다는 후문이다. 일요신문DB
지난 12월 초까지만 해도 박근혜 정부의 3기 경제팀을 이끌어갈 새로운 경제부총리로 제일 먼저 꼽힌 인물은 임종룡 금융위원장이었다. 현 정부 들어 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 전격 발탁된 데 이어 1년여 만에 다시 금융위원장으로 영전하는 등 정부의 신임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데다 박 대통령이 내세운 4대 개혁 과제 가운데 하나인 금융개혁을 밀어붙이며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경제 관련 법안의 국회통과가 늦어지면서 일이 꼬였다. 정치권과의 관계를 풀어가려면 일을 잘하는 실무형보다 국회와 소통이 가능한 ‘정무형’ 인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18~19대 국회의원 출신인 유일호 전 국토부 장관이 임 위원장을 제치고 경제부총리 후보자로 간택됐다. 오는 4월 총선 출마를 위해 불과 한 달 전 장관직을 내던진 유 후보자를 서둘러 내각으로 유턴시킨 것만 봐도 그가 선택된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머쓱해진 쪽은 임 위원장이다. 금융권에서는 임 위원장의 부총리 임명을 기정사실화하는 기류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각이 단행된 뒤 “금융개혁에 더 집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며 담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서운함을 애써 감추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임 위원장의 쓰린 속을 더욱 긁어놓는 것은 최근 그의 주변에 쌓여가는 난제들이다. 당장 유일호 경제부총리 후보자와 시각차를 보여 온 부동산과 가계부채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숙제다.
유 후보자는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국토부 장관으로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이끌었다. 주택담보대출 급증과 부동산 공급 과잉 논란의 주역인 셈이다. 이 때문인지 자칫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는 부동산과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주택 공급에 대해서는 “공급 과잉으로는 안 갈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고, 주택담보대출 역시 “금융당국에서 가계대출 대책이 나왔고, 가계부채가 더 커지지 않을 것”이라며 방어막을 쳤다.
문제는 임 위원장이 다른 얘기를 했다는 점이다. 임 위원장은 “가계부채 증가세가 지속될 것”이라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총선 이후인 올해 5월부터 지방을 중심으로 주택담보대출을 줄일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미묘한 차이지만 유 후보자의 지휘를 받게 된 임 위원장 입장에서는 장단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처지다. 주택대출을 조이면 부동산 수요가 줄어 공급과잉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느슨하게 하자니 가계부채 고삐가 풀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임 위원장은 내부적으로 산하기관인 금융감독원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가 취임한 후 그간 금융위와 금감원은 유례없는 허니문 시기를 보냈다. 진웅섭 금감원장이 임 위원장의 정책 방향에 적극 호응하며 몸을 낮춘 덕에 마찰음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지난 연말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금감원이 어수선한 틈을 타(?) 임금피크제 도입과 조직 확대 등을 시도하면서 임 위원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금감원의 임금피크제 도입, 조직확대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금융위 관계자는 “진웅섭 금감원장이 관행적으로 실시하는 검사를 꾸준히 축소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검사 대상이 늘었다는 것은 핑계”라며 “금융사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는 판에 금융회사들의 출연금으로 운영되는 감독기관이 몸집을 불리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비판했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임금피크제를 놓고도 충돌했다. 금감원은 지난해 8월 직급별로 2~3년 동안 기존 임금의 120~220%를 받는 조건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하지만 지난 연말 금융위는 “임금 지급률이 너무 높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금융위 측은 “자산관리공사나 예금보험공사 등 다른 금융위 산하 금융공기업 수준으로 지급률을 낮추라”면서 예산 배정을 거부했다.
금감원은 “노사 간 합의사항이기 때문에 금융위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이 싸움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던 금감원 노조위원장이 퇴직 하루 전인 지난 12월 30일 금융위가 제시한 새로운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인 뒤 퇴직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앙금이 남았는지 금감원에서는 불만 섞인 푸념이 계속 들리고 있다. 금감원 한 관계자는 “외부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금감원 직원들은 박봉에다 야근이 일상”이라면서 “인력 확충이나 임금 현실화가 좌절돼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자 평소 ‘통 큰’ 리더십으로 포용력을 발휘해온 임종룡 위원장의 입에서 강력한 경고가 나왔다. 임 위원장은 얼마 전 공개석상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말라”며 금감원을 압박했다. 더 이상 금융당국 간 불협화음이 밖으로 새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 위원장이 슬로건으로 내세운 금융개혁도 위기를 맞고 있다. 금융개혁의 핵심 동력인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폐기될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워크아웃이 필요한 기업들이 기촉법을 적용받지 못해 회생 가능성이 있는데도 법정관리에 돌입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 금융개혁은커녕 “기업이 저 지경이 되도록 금융당국은 뭘 했느냐”는 등 불똥이 튈 수 있다.
이렇듯 경제부총리 영전 실패의 후유증을 치르고 있는 임 위원장은 조만간 금융위원장 취임 후 첫 인사를 실시한다. 조직 내 2인자 격인 정찬우 금융위 부위원장이 3월 임기가 만료되고, 때마침 기획재정부 차관 인사가 맞물려 있다. 이를 통해 임 위원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꾸린 자신만의 진용으로 현 상황을 돌파해 나갈지 주목된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