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조카인 윤홍 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어릴 적부터 예쁨과 관심을 받고 자랐다. 후에 그것이 윤봉길 의사 덕인 것을 알게 됐다. 정부에서 전봇대에 광고를 싣는 사업 독점권을 줘 유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1996년 무렵 2세들 간의 사업권 다툼으로 결국 독점권을 국가에 반납했다. 이후 윤 씨는 케이블 방송 사업을 벌였으나 사기에 휘말려 접게 된다. 윤 씨는 경제적 어려움과 두 번의 결혼 실패 등으로 사회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돈을 다 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2009년 7월 27일 베이징으로 출국했다.
“막상 돈을 다 쓰니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손을 벌리게 됐다. 처음엔 북경에 있다가 물가가 비싸 연길로 또 두만강 근처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타국에서 굶어 죽거나 한국에서 잡혀가느니 북에 넘어가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윤 씨는 100m 정도 꽝꽝 얼어있던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밀입국했다.
“처음 3박 4일간 군부대에 있었다. 가자마자 학력 경력 가계력 등을 조사했다. 내가 윤 의사 조카인 걸 알자 평양에서 고위층 인사가 내려왔다. 이후엔 원산 초대소에서 있었다. 거실과 방이 있는 곳에서 특급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특히 반찬은 항상 11가지가 넘었다. 항상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기본으로 육류가 최하 세 가지가 나왔다.”
검찰 조사에서 윤 씨는 북측 인사와 만나 미군 철수와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2011년 숨진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분향소를 참배하는 등 이적행위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재판부는 찬양고무 혐의에 대해선 “김정일 분향소에 헌화 묵념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수용된 상태에서 지도원의 종용에 따라 행한 것이고 북한체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선전하거나 찬양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북측이 평양에 ‘말뚝 박으라’며 궁궐 같은 집과 영화배우나 대학 교수 등 원하는 직업 재가 자리도 알아봐주겠다고 회유했다. 글을 쓰라고 시키거나 북한 노래를 가르치는 등 세뇌 교육도 시켰다.”
검찰 조사 결과 윤 씨는 북한에 머물며 기대했던 것과 다른 북한체제에 실망하고 남한으로 송환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결국 윤 씨는 다른 밀입국자 5명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북한으로 갈 땐 꽁꽁 얼어 있는 두만강을 건너 밀입국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땐 판문점을 거쳐 송환됐다.
“오래 있다 보니 시내도 나가고 관리인 등과 말을 트게 됐다. 시내는 우리나라의 50년대 이하 수준이었고 고위층 인사 몇 명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상황도 마땅치 않았고 허무하게 역적 소리 들으며 오해를 살 순 없었다. 징역을 살게 될지라도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국민으로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측에 서울에 보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서울시 중랑구 담안선교회에서 지내는 윤봉길 의사 조카인 윤홍 씨가 북한 밀입북에서 송환까지 파란만장했던 삶에 대해 털어놨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윤 씨 말에 따르면 그 즈음부터 식사 대접의 질이 낮아지며 고문이 시작됐다. 심한 고문으로 인해 이빨도 모두 빠졌다고 한다. 실제 윤 씨는 틀니를 착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평양에서 고위층 관계자가 왔다며 개인 면담을 했는데 관계자는 “생활이 어떠냐” “불편한 점이 없냐”는 등의 말만 물었다고 한다. 이에 “이가 없어 밥도 먹지 못하고 가끔 죽 정도만 먹는다. 틀니를 해달라”고 윤 씨가 요청하자 얼마 뒤 별안간 새벽 1시에 틀니를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동이 틀 무렵 임시 틀니를 맞춰 얼른 버스에 타라고 했다. 윤 씨는 당시 그 버스 안에 젊은 한국인 서너 명과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어딜 가느냐는 물음에도 “고생했으니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라고만 이야기했다고 한다. 당시 윤 씨는 그 차량이 평양으로 가는 줄 알았다고 하는 데 정작 버스가 향한 곳은 판문점이었다.
“원산에서 평양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일직선이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을 하면 평양이고 좌회전을 하면 개성이다. 버스는 순식간에 좌회전을 했다. 끝까지 송환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지 않고 거의 다 와서야 이야기 해줬다.”
그렇게 판문점을 통해 한국으로 송환된 윤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지난 2014년 1월 밀입북해 북측 관계자들과 접촉한 혐의(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찬양 등)로 구속 기소된 윤 씨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요즘 윤 씨는 서울 중랑구 소재의 담안선교회에서 지내고 있다.
“90일 동안 서울 구치소에 있었다. 나가면 갈 곳이 없어 난감해 하던 중 서울구치소 직원이 담안선교회를 추천해줬다. 처음엔 서울에 아는 사람이 많아 꺼려졌지만 여의치 않아 오게 됐다. 하지만 시설도 좋고 대우도 좋고 터치하는 사람도 없다. 선교회 배려로 방도 혼자 쓰고 있다.”
이렇게 북한을 다녀온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 윤 씨는 마지막으로 반공의식 고취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북에 갔다 와보니 같은 하늘 아래서 그들과 함께 숨 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 또한 반공 의식이 투철해졌으며 우리나라의 최우선 과제 또한 반공의식 고취라고 생각한다. 낙후된 중랑구의 발전을 위해 내년 총선에 출마할 예정이다. 또 자서전도 집필 중이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
윤봉길 의사 후손 어떻게 사나 ‘소녀상 테러’ 일본인 상대 조카 윤주가 소송전 벌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5월 28일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윤 의사의 시신은 인근 공동묘지에 암매장되었다가 해방 후 백범이 유해를 봉환해 효창원 3의사 묘역에 안장했다. 윤 의사는 5남 2녀 중 맏이다. 윤 의사는 부인 배용순 여사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으나 차남은 어린 시절 사망했다. 윤 의사의 맏아들인 윤종 씨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했다고 알려졌다. 윤종 씨와 김옥남 여사 사이에는 1남 6녀가 있다. 현재 장손자 윤주웅 씨는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아 현대 자동차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장손녀 윤주경 씨는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다. 윤 의사의 장조카인 윤용 씨는 현재 윤 의사 직계의 총책임인 승조회장을 맡고 있다. 윤 의사의 조카 가운데에선 윤주 씨도 있다. 그는 위안부 소녀상과 윤봉길 의사 순국비 등에 말뚝 테러를 한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 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 내 화제가 된 바 있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조카 분들이 워낙 많은 데다 현재 나이가 많아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하셨다”며 윤 의사 후손들의 근황을 짧게 밝혔다. [민] |
윤홍 씨 몸 의탁한 담안선교회는 어떤 곳 형사 부인이 살던 집 기부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 비행을 저지르던 임석근 목사는 청소년기를 소년원에서 보내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군대에서 신앙심을 갖고 구두닦이부터 시작해 신학대를 졸업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담안선교회는 출소자의 사회 적응을 돕는 자활시설이다. 임 목사는 출소자 자활시설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고 전도사 시절부터 강연을 했다. 그 때 기적처럼 만난 것이 가구점을 운영하던 이경희 이사장이다. 그는 임 목사의 뜻을 높이 평가해 선뜻 후원금을 건넸다. 그게 담안선교회의 시발점이 됐다. 이후도 이 이사장은 꾸준히 후원금을 내며 지속적으로 선교회를 도와주고 있다. 10여 년 전 낙후된 건물을 신축해야 할 시점엔 중랑경찰서의 한 형사의 부인이 찾아와 살던 집을 기부하기도 했다. “폐암 투병 중인 형사 출신 남편이 그동안 범죄자들에 죄책감을 느껴서”가 기부 이유였다고 한다. 임 목사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며 “이후 건물 증축을 위해 후원금을 받으러 고군분투 했다”라고 말했다. 임 목사에 따르면 임 목사는 당시 A 화장품 후원을 받으러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A 화장품은 비영리단체에 1억 5000만 원을 후원하기로 구두 약속 한 상황. 이에 임 목사는 해당 단체를 찾아가 사정하자 단체는 “A 화장품에서 단체로 후원을 받고 그 후원금을 다시 담안선교회에 주겠다”고 했다. 증축 소식을 듣고 찾아온 A 화장품 임원은 임 목사의 뜻을 높게 사 추가로 1억 5000만 원 후원금을 더 쾌척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기업과 시민의 도움으로 담안선교회는 현재의 모습까지 올 수 있었다. 30여 년 전 임 목사와의 인연으로 입소자들 사이의 일명 ‘메신저’ 역할을 하는 엄상익 변호사도 담안선교회를 돕고 있다. 엄 변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매주 일요일 봉사 활동을 나간다. 후견인 역할과 입소자 간 ‘교통정리’를 담당한다”고 말했다. 세상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분위기가 험할 수도 있을 것이란 엄 변호사의 말에 겁을 먹었으나 담안선교회로 취재를 나간 기자는 점심까지 야무지게 얻어먹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민] |
출소자 갱생 돕는 담안선교회 임석근 목사 ‘담장’ 안팎을 잇는 가교 임석근 목사는 기자에게 편지 한 통을 보여주며 자신의 스케줄을 정리했다. 임 목사의 스케줄러는 전국 각지의 교도소 명과 재소자 이름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다음 달 출소할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선교와 갱생 강연을 하는 임 목사는 출소자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30여 년 전 ‘담안선교회’를 세웠다. 중랑천변에 위치한 담안선교회는 범죄자가 자립할 수 있는 준비 기간을 주며 ‘담장 안’과 ‘담장 밖’의 가교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선교회의 이름도 ‘(교도소) 담 안에 있는 사람을 돕자’는 의미에서 따왔다. 임 목사는 “교도소에 가둔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도 사회도 외면하고 전과자기에 직장 구하기도 어렵다. 출소자의 사회 적응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갱생시설이 많아져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사람이 돼야 재범도 막을 수 있다. 재범의 악순환을 끊어 내는 기회를 주는 곳이 갱생시설”이라고 말했다. 현재 담안선교회는 104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세 동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신축 건물인 제1생활관은 남성 입소자들의 2인 1실 생활관, 사무실과 지하 식당이 있다. 건너편의 제 2생활관 1층은 여성 입소자가 사용하고 있으며 2인실과 4인실이 있다. 2층부터는 가족 단위 생활관이며 지하엔 예배당이 있다. 나머지 한 건물에는 탁구대와 컴퓨터 등 휴게 공간이 마련돼 있다. 담안선교회 입소자들은 오전 5시에 아침 식사를 한 후 각자의 일터로 나간다. 아무래도 전과자다 보니 막노동이나 광고 부착 등 할 수 있는 일도 매우 제한적이다. 임 목사는 “무직자의 경우 취업 알선을 해준다. 대개 노동판이고 여성의 경우 식당이 전부다”라며 “보통 입소를 하게 되면 가장 기본인 운전부터 가르친다. 대리운전 등을 할 수 있는 일이 비교적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담안선교회는 법무부 특별법 비영리 법인으로 등록돼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 사회복지시설로 인가 받지 못해 사회복지시설로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겨울에 보일러를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트는데도 매월 1000만 원을 육박하는 전기세가 나오는 실정이다. 임 목사는 “입소자들은 이곳이 교도소보다 더한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절약하는 데도 예산은 매번 부족하다”라며 “행정 절차가 복잡해 피복 하나를 구입하려고 해도 머리에 쥐가 난다”고 말했다. 임 목사는 이렇게 사각지대에 놓인 담안선교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보건복지위원회 김춘진 위원장과 서울시 등에 건의해 사회복지시설에 갱생보호시설이 들어가도록 조례 추진을 했으나 보건복지부에서 시행령이 내려지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 목사는 “선교회가 법무부에 비영리 법인으로 허가를 받은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에선 무관심하다. 사회복지시설 외에는 다 비인가시설로 취급하기 때문”이라며 “법무부에 이런 애로사항을 말하면 입소자들은 징역을 다 살고 나온 사람들이니 구청 관할이라며 서로 책임을 떠밀기만 한다”고 말했다. 현재 선교회는 법무부에서 5억 여 원가량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민간 후원으로 4억 원가량 충당하고도 선교회 1년 예산이 10억여 원이라 1억여 원이 부족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여 년 전부터 인근에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담안선교회는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의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 임 목사는 “입소자들이 안정을 찾고 사회에 적응을 하는 등 희망을 갖고 살 수 있게 유예 기간을 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