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음주운전으로 13명의 사상자를 낸 이선 카우치는 ‘부자병’을 앓고 있다고 호소해 보호관찰 명령을 받았다. 카우치가 지난달 28일 멕시코로 도망쳤다가 이민당국에 체포된 모습. AP/연합뉴스
지난 2013년 6월, 텍사스의 한 고속도로에서 심각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미성년이었던 16세 소년이 아버지의 픽업트럭을 몰고 가다가 갓길에 정차하고 있던 SUV 차량을 들이받은 것이었다.
이 사고로 SUV 차량 운전자였던 브레나 미첼을 포함해 그녀의 모친과 딸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고장난 SUV를 수리해주고 있던 지역 목사인 브라이언 제닝스 역시 사망했다. 충돌 당시 피해자들이 45~60m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충격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아닌 게 아니라 조사 결과 범행을 저지른 카우치는 기준 허용치보다 세 배가량 더 높은 혈중 알코올 농도 0.24의 만취 상태였으며, 혈액에서는 신경안정제인 바리움도 검출됐다. 또한 제한속도가 시속 60㎞인 고속도로에서 무려 110㎞로 달리고 있었다는 점도 대형 사고를 부른 원인이었다.
이밖에 이 사고로 트럭에 타고 있던 카우치의 친구들을 비롯해 아홉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이 가운데 한 명은 현재 식물인간이 된 상태다. 당시 카우치는 사고 발생 직후 트럭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 이선 카우치야. 내가 너희들을 꺼내줄 거야”라며 횡설수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우치는 곧 기소됐고, 법정에 섰지만 재판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검사 측이 카우치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했던 것과 달리 법원은 보호관찰 10년과 재활 치료를 명령하는 데 그쳤던 것. 더욱 황당했던 것은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이유였다. 카우치의 변호인 측이 이른바 ‘부자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소년의 선처를 호소하자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보호관찰 기간에 맥주 마시기 게임 ‘비어퐁’을 즐기는 카우치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왼쪽)이 SNS로 퍼졌다. 이 동영상이 문제가 되자 카우치는 멕시코로 도주했지만 현지에서 체포됐다. 오른쪽은 음주운전 피해자 차량.
당시 변호인 측의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했던 심리학자인 딕 밀러는 카우치가 ‘부자병’에 걸렸다고 주장하면서 “삶이 너무 풍요로워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카우치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카우치의 행동을 부모의 잘못된 훈육 방식 탓이라고 했다. 밀러는 “소년은 부모로부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면 미안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랐다. 만일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돈을 주면 된다고 배웠다”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였던 부모가 너무 버릇없이 키운 탓에 돈으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안이한 사고를 갖게 됐고, 이 때문에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일종의 정신질환을 앓게 됐다는 것이었다. 결국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없게 된 소년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과를 깨닫지 못하게 됐다고도 밀러는 말했다.
이 판결에 온 미국 사회는 들끓었다. 돈으로 정의를 샀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과연 ‘부자병’을 정신질환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를 두고 설전이 오갔다. ‘부자병’이란 것이 과연 어떤 증상을 의미하는지 애매하고, 또 아직 의학계에서 정확히 질병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 시민은 “이번 판결은 피해자 가족들의 따귀를 때린 것과 같다. 가해자는 캘리포니아의 고급휴양시설과 같은 재활센터로 보내고, 피해자 가족들은 묘지로 보낸 꼴이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무리됐던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 12월 법원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 술을 마시는 카우치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SNS에 올라오면서였다. 6초짜리 동영상에는 친구들과 일종의 맥주 마시기 게임인 ‘비어퐁’을 즐기는 카우치의 모습이 담겨 있었으며, 동영상을 올린 소녀는 “미성년인 카우치가 법원 명령을 어기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더 많은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글을 올렸다.
동영상이 문제가 되자 카우치는 곧 행방을 감추었다. 모친인 토냐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 도주했던 카우치는 그렇게 수사 당국을 피해 멕시코에서 숨어 지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잠적한 지 17일 만인 지난달 28일, 피자 배달을 주문한 카우치의 휴대전화를 추적했던 멕시코 이민당국이 카우치 모자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휴양도시였던 푸에르토 바야르타에서 체포됐던 카우치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금발인 머리와 수염을 짙은 갈색으로 염색한 상태였다. 모친은 즉시 미국으로 송환됐지만 카우치는 체포 과정에서 멕시코 당국이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권침해를 주장하면서 송환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소년의 부모는 대체 얼마나 부자기에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댈러스의 <D 매거진>이 카우치 부부를 가리켜 ‘역대 최악의 부모’라고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1986년 ‘클리번 금속 공장’을 설립한 부친인 프레드 카우치는 직원 수 40명가량의 연매출 959만 달러(약 115억 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다.
어릴 때부터 말썽꾼이었던 카우치는 13세 때부터 직접 차를 몰고 학교를 다녔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학교 측이 카우치의 부모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추궁하자 되레 부모는 “학교를 통째로 돈으로 사버리겠다”며 협박하기도 했었다. 결국 전학을 갔지만 학교를 자퇴한 카우치는 15세 때부터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술을 마시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한번은 트럭 안에서 의식을 잃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는 14세 소녀와 함께 있는 모습이 경찰에 발각돼 기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미성년이란 이유로 보호관찰 및 알코올 치료와 열두 시간의 사회봉사 활동 명령을 내리면서 훈방 조치했다.
카우치가 비뚤어진 이유는 단지 돈이 많은 부모 밑에서 자란 탓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안정한 가정환경이 문제였다. 모친은 진통제를 남용하는 약물중독자였으며, 부친은 허구한 날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폭력범이었던 것.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했던 카우치 부부는 결국 2006년 이혼했으며, 이런 부모를 보면서 자란 카우치는 “엄마아빠는 거의 매일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곤 했다. 부모님이 나를 사이에 두고 싸우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모가 이혼한 후 주로 모친과 함께 살았던 카우치는 몇 년 후 부모가 다시 재결합하자 홀로 독립해서 살기 시작했다. 텍사스 외곽의 벌레슨에 위치한 대저택에서 혼자 생활했던 카우치는 고삐 풀린 망아지인 양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학교도 가지 않은 채 매일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열면서 흥청망청했다.
대형 사고를 일으켰던 그날 밤에도 카우치는 친구들 여러 명과 마트에서 맥주 두 박스를 몰래 훔쳐 파티를 벌였으며, 추가로 술을 더 사기 위해 트럭을 몰고 가다가 사고를 저질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멕시코에서 다시 검거된 카우치 모자가 다시 법정에 설 경우 여론을 의식한 재판의 양상은 2년 전과는 사뭇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망명을 신청하지 않는 이상 멕시코에 장기 체류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 미국으로 압송될 것이 뻔한 카우치는 곧 성인이 되는 19세가 되면 성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고, 그럴 경우 최고 40년 형까지 선고받게 될 전망이다. 또한 모친은 체포 방해 혐의가 인정될 경우 2~10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또한 멕시코에서도 다시 술을 마시고 클럽을 드나들면서 불법적인 생활을 지속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돈으로도 법망을 피해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부자병 ‘어플루엔자’란? 너무 풍요로워 감정통제 못해 소비지상주의를 비난하는 말이기도 한 ‘어플루엔자’는 현재 미정신의학회로부터 의학적 질병으로 공식 승인은 받지 못한 상태다. 콜로라도대학의 제프리 매츠너 교수는 “‘어플루엔자’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와 비슷하다”면서 “이런 사람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처지나 요구는 안중에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말로 하면 ‘왕자병’과 가깝기도 하다. ‘어플루엔자’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97년 무렵부터였다. PBS의 다큐 프로그램인 <어플루엔자>와 2001년 출간된 책 <어플루엔자> 등을 통해서였다. 다큐 <어플루엔자>의 공동 제작자였던 존 드 그라프는 “‘어플루엔자’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 때부터였다”고 주장한다. 레이건의 친부자 성향 정책으로 부자들을 위한 세금 감면 정책이 실시됐던 반면, 빈곤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은 붕괴되면서 빈부 격차가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라프는 “올해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미국은 어플루엔자 제국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를 가리켜서는 ‘어플루엔자 백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플루엔자’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7년 출간된 책 <골든 게토: 부의 심리학>을 통해서였다. 저자인 제시 오닐은 이 책에서 풍족한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절망감에 대해 다루면서 “어플루엔자를 앓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정신적 장애로 고통스러워한다”고 말했다. 그 후로 ‘어플루엔자’는 보통 부잣집에서 자란 청소년들을 가르키는 데 쓰이고 있으며, 이런 청소년들은 특권의식을 갖고 있지만 책임감은 없으며, 잘못된 행동에 대해 변명만 늘어놓는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술과 마약에 손을 대는 등 불량 청소년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2007년 영국의 심리학자인 올리버 제임스는 <어플루엔자: 성공하면서도 미치지 않는 방법>이란 저서에서 전 세계가 ‘어플루엔자 유행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어플루엔자’를 가리켜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격렬한 질투심과 과도한 욕망에 따른 우울증과 불안감’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현대 사회에서 ‘어플루엔자’ 증상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부의 불균형이 증가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사회가 보다 불공평해질수록 시민들의 불행도 비례해서 증가한다는 것이다. ‘어플루엔자’를 가리켜 ‘돈, 소유, (신체적 및 사회적) 겉모습, 명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제임스는 이런 증상은 과도하게 부를 추구하는 소비지상주의적인 나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도 지적했다. 다시 말해 ‘이기적 자본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플루엔자’는 유행병이라는 의미처럼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까. 전문가들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2010년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자제력은 보통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면 나 역시 자제력을 쉽게 잃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주위에 자제력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나 역시 자제력을 발휘하게 된다. 2007년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연구 결과 역시 비슷했다. 당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변 친구들이 비만일 경우 나 역시 비만이 될 확률은 57%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 |